"비나는 힘으로 해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싸워야 할 때가 오면 무조건 선두에서 돌진한다."
작전 전
런디니움 폐공장
1098년 12월 8일 4:43 P.M.
침착한 여성 │G12 구역…… 보아하니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나 보네. 번호도 안 보이고…… 여기가 맞긴 한가?
침착한 여성 │후우…… 저 끔찍한 마족들은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니까……
신중한 용병 │거기 아줌마, 길을 잘못 든 것 같은데.
신중한 용병 │(어이 신참, 이 여자 돌려보내고 와.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건지 '친절하게' 물어보고.)
신중한 용병 │(잊지 마라. 이번에는 뒤처리 똑바로 해둬. 또 보스 화나게 하지 말라고.)
지친 용병 │하아. 당신도 들었지? 따라오라고……
침착한 여성 │이거 놔!
침착한 여성 │너희들은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도 없는 거야?
침착한 여성 │미키 로빈슨, 그러니까 파라곤 부대의 영웅…… 에, '중 한 명'이 내 남편이야. 약을 가져오라고 부탁받았어.
침착한 여성 │무, 무서운 검은 돌의 병을 완화해 주는 약이야. 남편은 이제 곧 걷지도 못하게 될 정도라서……
지친 용병 │허, 또 재수 없는 놈이 한 명 더……
신중한 용병 │닥치고 있어 봐.
신중한 용병 │잘 들어라. 나는 그 미키라는 놈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신중한 용병 │그리고 댁이 여기서 건질 건 부랑자들이 쓰는 유통기한 지난 환각제나 죽은 마족의 뼈 정도지.
침착한 여성 │하지만……
신중한 용병 │그리고 광석병을 치료할 약이 필요하다면 새로 지어진 요양소에서 찾아봐라. 새로 부임한 의장님이 약속한 거니까.
침착한 여성 │……잠깐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어. 거기 있는 약으로는 한참 부족하단 말이야.
침착한 여성 │여기서 약을 구할 수 있다는 거 다 알아. 남편은……
침착한 여성 │저기, 내가 안전한 곳에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숨겨뒀어. 전부 컴버랜드 공작 저택의 귀한 물건들이야. 예전에 공작님께 포상으로 받은 것들이거든? 약만 구할 수 있다면……
신중한 용병 │바깥을 순찰 중인 도시 방위군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지친 용병 │따라와, '부인'.
단말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청구서에 서명시키고, 내일 약을 받으러 오게 하도록.』
신중한 용병 │네, 보스! 그런데 혹시 돈이 없다면……
단말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때는 평소대로 처리해.』
지친 용병 │이상하네. 보스는 이런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데. 흐음, 그럼 이제부터……?
신중한 용병 │흥, 저 여자한테 계약서나 넘겨.
침착한 여성 │고마워, 정…… 잠깐, 이런 끔찍한 조건은 남편한테 들은 적 없어! 이런 계약서에 서명하면 우린……
신중한 용병 │멀쩡하게 살 수는 있겠지. 우리가 추심하러 갈 때까진 말이야.
신중한 용병 │그쪽 남편이라는 영웅 나으리는, 아무래도 아내에게 그리 정직하지는 않았나 본데.
신중한 용병 │자, 떨지 말고 펜 꽉 잡으라고. 정 힘들면 우리가 대신 서명해 줄 수도 있고.
침착한 여성 │……
펜을 쥔 그녀의 손을 용병이 단단히 붙잡았다. 손의 떨림은 점점 더 심해졌고, 더 이상 아까처럼 침착을 가장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문 채 용병이 이끄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신중한 용병 │살아있는 하루하루를 즐겨라. *빅토리아 비속어*같은 전쟁은 끝났으니.
신중한 용병 │'밀스카'에 도움을 청하는 게 당신과 당신 남편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거야, 부인.
ˇ
방송 소리 │오늘 아침, 런디니움의 임시 공중보건 행정관 겸 임시 물자 조달 부장 메이저 씨가 뉴 오슈테리그 구의 사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방송 소리 │오늘, 알렉산드리나 의장은 의회를 대표하여 감염자를 지원해 온 메이저 씨의 공로를 기리며,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방송 소리 │메이저 씨의 생전 마지막 일정은 도시 내 의약품 부족 사태 해결에 관한 협의를 위한 노르망디 공작령 방문이었습니다.
방송 소리 │그러나 신뢰성 높은 소식통에 따르면, 메이저 씨의 사인은 광석병으로 인한 급성 발작이었다고 합니다.
방송 소리 │메이저 씨는 광석병 감염 사실을 숨겨온 것에 더해, 최근에는 의장과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방송 소리 │도시 내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민감한 시기에, 작위 상속권을 상실한 메이저 씨의 죽음 뒤에 조사해야 할 수많은 내막이 있는 것은 명확해 보입니다.
방송 소리 │살카즈가 군대를 철수한 지도 이미 두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살카즈와 관련된 악질적인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방송 소리 │그리고 전설적인 부대, 파라곤 부대의 처우에 대한 안건은 결정되었을까요?
방송 소리 │대다수 공작의 지지를 받는 새 의장에게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방송 소리 │저희는 의장의 측근인 케이트 모리건 씨와 연락을 취해, 심층 취재를……
의장실 안에 울리던 라디오 소리가 돌연 멈췄다.
모건 │헛소리도 작작 해야지!
모건 │그놈들, 요양소 식당에 잠입해 있다가, 내가 밥 먹을 때를 노려서 교묘하게 유도했었어……

비나 │그래서 때려눕혔다는 거군.
모건 │그렇게 하면…… 그놈들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보도할 생각이 사라질 것 같아서……
모건 │미안. 사람들이 너를 보는 시선에 영향을 줄 줄은 몰랐어……
비나 │아냐. 나라도 그놈들을 전부 걷어차 버렸을 테니까.
모건 │응? 그래도……
비나 │자기 억측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걸 생업으로 하는 정보상들이 그 상대라면,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이 미리 정해둔 답을 바꿀 수 없어.
비나 │어차피 입을 못 막을 거라면, 직접적인 수단을 쓰는 게 덜 번거로울 수도 있지.
비나는 주먹을 맞대고, 이제는 본능적으로 나오는 스텝을 능숙하게 밟았다.
복싱장에서 지내던 그 시절처럼.
모건 │하핫! 이래야 역시 내가 아는 비나지! 알고 있었다니까. 한나 따위는……
모건 │윽……!
비나 │……정말 불편한 옷이군. 수선을 맡겨야 하나……

델핀 │실력 있는 재단사를 알고 있어.
델핀 │젊을 때 왕실 의복을 만들던 사람인데, 이번에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아무도 일을 안 맡기려고 한대.
비나 │……그자도 감염됐나?
델핀 │응.
모건 │크흠, 맞다, 저번에 통신으로 얘기했던 그 건은 좀 진전이 있어?
델핀 │상황이 약간 복잡해.
델핀 │그 살카즈는 이미 체포돼서, 현재 시네셀드 의회실에 구속되어 있어.
델핀 │현 단계에서 보면, 이번 건은 지하 폐공장에서 활동하는 조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
비나 │……'밀스카'.
델핀 │배후에 그 노르망디 공작 후계자의 계략이 있는지는……
비나 │다시 한번 그 여자와…… 협상해야겠군.
비나 │메이저 씨에게 일어난 일, 도시 시민들의 의약품 공급, 그리고 '밀스카'와 살카즈들.
비나 │요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두 달 전처럼 무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
델핀 │적응이 빠르네, 비나 씨. 지금의 의회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안심해, 나도 도울게.
델핀 │오래전부터 어머니께 훈련을 받아온 것은 이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였지…… 어머니께서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어.
모건 │……
델핀 │모건 씨?
문밖의 목소리 │의회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비나 │……
비나 │모건은 단지 지금의 생활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다들 그렇기도 하고.
비나 │시즈는 가능해도, 의장에겐 불가능한 일도 있지.
비나 │살카즈에게 부상을 입은 사람들 상태는 어떻지?
델핀 │로도스 아일랜드 의료부의 동료가 돌보고 있어. 현재로서는 생명에 지장은 없고.
델핀 │그리고 그 조악한 약의 출처를 추적한 결과, 대부분이 '밀스카'에서 온 것으로 확인됐어.
델핀 │많은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쓰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떠돌이들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는 처지가 되고 있지.
델핀 │'밀스카' 본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수하 관리가 허술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비나 │알레데일은 알고 있어.

런디니움의 어두운 곳에서 가장 큰 위세를 떨치는 조직, '밀스카'.
이미 세상을 떠난, 변치 않는 고결함을 간직하던 컴버랜드 가문의 마지막 빛, 알레데일.
그 두 이름 아래에 놓인 모습이 대체 언제부터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는지, 비나 본인조차 잊어가고 있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때였던가?
비나는 무의식중에 옷을 매만졌다. 파라곤 부대의 '영웅적인 리더'가 왕가의 오래된 갑옷을 걸치고, 성왕궁 서쪽 회당을 나설 때……
그녀는 이미 동이 틀 무렵에 카즈델 군사위원회의 깃발을 내렸고, 익숙한 실루엣과 증기 기사들이 하늘을 덮은 증기 속에서 조용히 몸을 감추는 것을 보았다.
그날, 알레데일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고, 등을 돌린 채 황폐한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비나 │……자, 의회실로 갈 시간이다.
ˇ
시네셀드는 한때 왕가의 소유였으며, 연회장으로 귀족들에게 대관하는 장소였다. 새 의회실을 어디로 할지 모두가 고민하던 때, 비나는 런디니움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혼란은 이 도시의 너무나 많은 것들을 파괴했다.
포스터나 영화에서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방이었다. 지금까지는 이 장소가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갱단의 모든 멤버가 모여 각자 구역에 관해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질식할 것처럼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실망스러운 장소일 뿐이다.
비나가 직접 인정한 적은 없지만,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초조한 의원 │(모건 씨…… 모건 씨……)
모건 │왜?
초조한 의원 │글 쓰고 계신 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게……
초조한 의원 │(바나비가 또 늦어서 찾으러 가려고 합니다. 또 만취 상태로 어디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요.)
모건 │어차피 비나도 아직 안 왔고, 가고 싶으면 가. 굳이…… 아니다, 잠깐!
모건 │생각났다. 너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결국 둘 다 회의 안 들어왔잖아.
초조한 의원 │그, 그건 밖으로 내쫓겨서……
초조한 의원 │모건 씨, 솔직히 말하면 저는 공장 도면을 들고 반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초조한 의원 │품질 검사 심사라면 어떤 부품의 데이터가 와도 알아낼 수 있고, 제 의견에 토를 달 공장장도 없습니다.
초조한 의원 │하지만 여기 앉아서…… 저 귀족 나리들과 대등하게 행동하고, 이 뭔지 모를 서류 더미를 뒤적거리면서 이 큰 도시를 관리하는 건……
초조한 의원 │(제 평생 관리해 본 가장 큰 장소는 제가 담당했던 그 작업장이 전부란 말입니다. 으으, 솔직히 기가 확 죽는다고요.)
모건 │우리도 있는데, 그 바보 귀족들이 뭐가 무섭다는 거야?
화려한 옷을 입은 의원이 모건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화려한 의원 │날씨가 참 좋군요. 다들 건강해 보이십니다.
모건 │크흠…… 그쪽도 그래 보이네.
초조한 의원 │거, 건강하고 말고요.
모건 │(으윽, 비나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자고.)
모건 │(저 녀석들도 바보는, 으음, 전부 다 바보는 아니잖아. 하지만 여기 앉아서 런디니움을 관리할 권리는 우리가 목숨 걸고 되찾은 거니까.)
모건 │(설마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만약 그렇다면 저 바보들이 어처구니없는 짓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널 두들겨 팰 거니까.)
초조한 의원 │아, 알겠어요, 알겠다니까요. 인드라 씨와 다그다 씨는 안 오십니까?
모건 │아직 치안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쁜 것 같아.
초조한 의원 │(하아, 저도 돌아가서 망치나 껴안고 자고 싶어요.)
화려한 의원 │오셨군요, 의장님…… 어, 이건?
모건 │비나! 너 등에 짊어지고 있는 거 그거……
초조한 의원 │바나비!
술 취한 의원 │크, 클라이브……
비나 │델핀, 자리에 앉히는 것 좀 도와줘.
델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시네셀드 입구에서 뻗어있었고, 그다음에도 비나 씨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지.
술 취한 의원 │저는 의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술 취한 의원 │그, 약품 부족 사태를 딱! 해결할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델핀 │……그렇다면 정식으로 제안서를 제출하세요. 의회가 정한 규칙을 개혁한 건, 애초에 우리 자신을 제한하기 위해서니까요.
초조한 의원 │델핀 씨, 바나비는 땡땡이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제게도 그 아이디어를 여러 번 얘기했어요!
초조한 의원 │다만 바나비도 저처럼, 이곳에만 오면 영혼잉라도 빠져나간 듯 상태가 이상해지는 것뿐이라고요. 말도 똑바로 못 하고, 마족을 무찌르던 때처럼 죽음도 두렵지 않던 그 용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고요.
초조한 의원 │그래서 별수 없으니까 술이라도 한잔하고 오라고…… 그러면……
모건 │걱정 마. 비나는 그런 일로 화 안 내니까.
델핀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의 새 의회는 가뜩이나 복잡한 상태니까요. 모두들 탐색전에 여념이 없고, 우리 역시 적응하며 배우는 중입니다…… 의장님을 포함해서요.
델핀 │우리에게 악의를 품은 이들을 전장이 아닌 곳에서 이기고 싶다면, 그들의 사고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델핀 │여러분들에게 그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모건 │……만약 우리가 결국 쟤들처럼 되어버리면?
초조한 의원 │저, 저는 그럴 일 절대 없어요, 모건 씨!
모건 │딱히 클라이브 네가 그럴 것 같다고는 안 했어.
델핀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어, 모건 씨. 그 누구도.
모건 │난 비나를 믿어. 한나와 다그다도 그렇고……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ˇ
비나 │오늘 임시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비나 │의회가 재결성된 이후, 우리는 줄곧 도시 내에서 활동하는 살카즈가 일으키는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아왔다.
비나 │런디니움 시민에게 의회는 '안전'을 약속했지.
비나 │그것이 위험한 살카즈든, 도시에 숨어있는 '밀스카'와 같은 용병이든, 의회는 항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비나 │의회는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악의적인 행위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살카즈 범죄자 │……날 재판에 넘기겠다는 건가?
비나 │재판은 없다, 살카즈. 의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임시 법령에 의거해 네 처벌은 명확히 정해졌다. 그리고 임시 법정의 심리 역시 통과되었지.
비나 │……모두가 동의한 방식으로.
살카즈 범죄자 │모두가 아니라, 너희들이겠지.
비나 │너는 선량한 상인에게 중상을 입혓다. 그가 원래 네게 주려 했던 빵 때문에.
살카즈 범죄자 │……그 자식이 아직 살아 있나?
비나 │살아 있다.
살카즈 범죄자 │좋아. 그럼 난 언제 죽일 거지?
비나 │……너는 그때 동족들과 떠나야 했어.
살카즈 범죄자 │날 기억하고 있나? 그럴 만도 하지. 그놈들이 군을 철수시켰을 때, 네놈이 나를 놓아줬으니.
살카즈 범죄자 │그런 의미에서 넌 내 은인이야. 파라곤 부대의 리더 양반.
비나 │……너는……
살카즈 범죄자 │'롱샷'. 내 딸아이가 날 그렇게 부르지. 그 당시 넌 내 이름을 묻지 않았고, 지금 여기 있는 놈들도 내 이름 따윈 상관도 안 하겠지만.
롱샷 │하지만 '롱샷'은 여기 일부 사람들을 대표해 앉아 있는 모두에게 묻겠다……
롱샷 │런디니움에서 태어나, 평생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살카즈는, 빅토리아인이라 할 수 있는가?
솔직히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칭 '롱샷'이라고 하는 살카즈의 목소리는 그다지 묵직하지는 않았지만, 소란스러웠던 의회실이 그 한 마디에 일순 고요해졌다.
나는 주변 사람, 특히 귀족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이미 답을 떠올린 사람은 선뜻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별다른 생각 없이 벌벌 떨고 있는 사람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살피며, 그에 동조할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생각하는 게 귀찮은 쪽이었다. 어차피 비나가 나 대신 생각해 줄 테니까.
그래서 그날, 나는 비나의 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성벽 위에서 도시를 떠나는 살카즈 부대를 바라보며, 비나가 답을 주기를 기다리던 그때처럼.

그 광경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날, 나는 비나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베어드를 죽인 살카즈들이 어째서 저렇게 당당하게 떠날 수 있냐고.

하지만 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런디니움 성벽 위
1098년 10월 8일 8:48 P.M.
살카즈 부대가 떠났다.
비공정이 엄숙하고 질서 정연한 부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라이프 스파인'이 만들어낸 파문이 도시 바깥의 폐허에 드리운 먹구름을 갈랐다.
비나는 성벽 위에 서서, 멀어지는 군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그녀의 고향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대지는 온통 상처와 흉터로 가득했다.
'암나남'이 런디니움에 남긴 상처가 회복되려면, 과연 몇 년이 필요할까?
인드라 │비나, 박사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놈들을 전부 때려눕힐 수 있어!
인드라 │우리 애들하고 공작 쪽에서 합류한 동료들이 아직 성벽 아래에서 대기 중이라고. 너만……
델핀 │한나 씨, 지금 이 순간 가장 침착해야 하는 건 우리야.
델핀 │나도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놈들을 여기 붙잡아 두고 싶어. 하지만…… 우리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비나 │……
다그다 │대공작들이 주력 함대는 그렇게 멀리 물러나지 않았어. 델핀.
모건 │다그다 말이 맞아! 귀족들이 뭘 꾸미고 있더라도, 우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체면 때문에라도 들어올 수밖에 없다니까?
델핀 │그러면, 겨우 살아남은 이들에게 다시 목숨을 걸게 할 생각이야?
델핀 │휴전 협정을 발표한 건 모두가 봤어. 화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모건 │……
인드라 │그놈의 참아 참아 참아, 개소리하지 말라고!
인드라 │이걸 참을 수 있겠냐!
인드라 │(흐느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많은 동료가…… 베어드가……
인드라는 단 1초도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당장에라도 성벽을 미끄러져 뛰쳐나갈까 봐 무서웠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피 흘리는 동료들을 이끌고 뛰쳐나갈까 봐 무서웠다……
비나 │한나……
다그다 │한나는 지금껏 계속 억눌러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비나. 내가 보러 갈게.
다그다 │말은 저래도 바보짓 할 애는 아니잖아.
모건 │비나, 베어드를 죽인 살카즈들이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떠날 수 있는 거야?
비나 │……
델핀 │이건 박사와 위셔델 씨가 얻어낸 최선의 결과야.
델핀 │런디니움은 더 이상 전쟁을 견뎌낼 수 없어. 희생된 사람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아.
델핀 │비나 씨……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야.
비나 │후…… 파라곤 부대 전원에게 경솔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전해.
비나 │박사?
-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은 동시에 여러 공작의 초청을 받았어.』
- 『우리가 런디니움의 전후 처리 회의를 참관하길 바라나 봐.』
비나 │처리…… 살카즈들이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에 말인가?
비나 │놈들이 그렇게나 급한 건가?
비나 │이제 와서 이 도시가 그놈들 손에서 놀아날 것 같지는 않은데.
- 『그쪽도 그걸 잘 알고 있어.』
▶- 『그래서 그쪽도 너를 선택한 거야.』
비나 │칫……
- 『거절해도 돼, 비나.』
비나 │……
비나 │박사, 여기는 내 집이야.
델핀 │비나 씨, 결정은 했어?
비나 │파라곤 부대의 전우들을 이끌고 도시로 돌입한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것 아니었나?
비나 │놈들은 잘 알고 있어. 나도 그렇고.
델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나는 당신의 결정을 지지해.
모건 │……
▶- 그럼 로도스 아일랜드가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지.
- 우리가 네 곁에 서겠어.
비나 │고맙다, 박사.
비나 │결국, 내 입장에서 가장 큰 도전은 이제부터라는 거겠지.
비나 │하, 놈들이 그 대단하신 입으로 무슨 소리를 늘어놓을지 궁금하긴 하군.
- 『곧 그쪽으로 합류할게.』
비나 │……집에 돌아가는 길이 항상 편안하지만은 않아, 그렇지?
작전 후
성왕궁 서쪽 회당
1098년 10월 8일 7:28 P.M.
전쟁 종식 직후

'소공작' │26년 전만 해도 이곳은 찬란한 곳이었습니다.
'소공작' │머리 위의 저 돔은 반짝반짝 빛났고, 두 달의 빛과 매혹적인 밤하늘은 밤새 열리는 댄스파티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였죠.
'소공작' │저는 여기서 폐하의 손등에 입맞춤을 올린 적도 있답니다. "알리스테어 폐하께 경의를", 아주 귀한 영광이었죠.

비나 │빅토리아에는 이제 국왕이 없다. 당신……
비나 │아니, 마치 백작이라 불러야 하나?
'소공작' │그냥 엘레노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소공작' │노르망디 공작님으로부터 마치 카운티 백작령을 하사받은 것은 백작 작위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업상의 필요 때문이라서요, 전하.
'소공작' │그때 국왕의 처형이라는 촌극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가까운 관계였을 겁니다, 비나 씨.
그녀는 보라색을 입힌, 금빛 부처꽃이 인쇄된 명함을 꺼냈다.
'소공작' │받아주세요. 형식을 중시하신다면 이쪽이 편하실 테니.
비나 │……너와의 인연은 깊지 않아서 말이지. 너희는 이 장소에서 런디니움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건가?
'소공작' │회의 장소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고려해 보면,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요?
엘레노어는 과거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홀 깊숙하게 자리한 빛바랜 조각상과 먼지 쌓인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는 빅토리아 국왕의 왕좌가 있다. 한때 국왕이 앉아 제국 전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던 자리.
그러나 지금, 문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까.
'소공작' │이곳에 미리 온 이유는 추억의 장소를 둘러보려는 것도 있지만,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얘기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으니까요.
'소공작' │당신도 저를 만나고 싶으셨던 건 아닌지?
비나 │……내가 네 약점을 잡고 있는 건 알고 있……
'소공작' │비나 씨, 로도스 아일랜드의 동료들은 이미 다른 공작님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을 겁니다.
비나 │다른 공작? 너나 노르망디 공작이 그 녀석들과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소공작' │저를 노르망디 공작님과 혼동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존경할 만한 분이지만, 런디니움의 사소한 문제를 처리하는 일로 공작님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지요.
'소공작' │다른 몇 분에 대해서도, 감히 저를 그분들에 비교할 수는 없지요.
'소공작' │살카즈 군대의 철수가 런디니움 재난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감염자 수의 추이를 계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지만, 결과는 불 보듯 명확하죠.
'소공작' │빅토리아의 약품 생산 라인은 부족하고, 감염자들을 위해 귀중한 생산 라인을 개조하겠다는 사람도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비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소공작' │저는 컬럼비아 군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많은 제약회사로부터 추천도 받았죠.
'소공작' │메울 수 없는 틈은 없답니다. 가격만 적절하다면요.
비나 │……협박인가?
'소공작'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당신의 자유입니다. 답을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손에 어떤 패를 들고 있는지 정리한 후에 다시 저를 찾아주세요, 비나 씨.
'소공작' │지금 이 순간이, 이후 긴밀한 협력 관계의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소공작' │그리고, 이 장소를 봐주세요. 당신의 일족은 한떄 이 낡은 건물 안에서 빅토리아 전체의 향방을 결정했습니다.
'소공작' │알렉산드리나 전하, 런디니움은 당신에게 너무도 작습……
??? │저는 오히려 이 도시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민망합니다만, 거리에 울리는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허둥대다 길을 잃고 말았군요.
??? │후우. 도시의 참상은 정말이지……

고도딘 공작 │많이 변했군요, 엘레노어. 내 뿔을 잡고 목마를 탔던 때가 아직도 기억납니다만.
'소공작' │그 관대함에는 여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노르망디 공작님께서는 좀 더 청결한 곳으로 휴향하러 가신다 하셨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는 건 어떠신지요.
고도딘 공작 │하하, 저장고에 있는 술을 다 마시기 전까지는 아까워서라도 영지를 한 발짝도 떠나고 싶지 않군요.
??? │노르망디라면 이 모임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길 줄 알았는데 말이지.

캐스터 공작 │상관없나. 우리가 오늘 여기 모인 이유는 바로 자네 때문이니까, 알렉산드리나.
고도딘 공작 │크흠, 그렇게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캐스터 공작.
고도딘 공작 │그 노장군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군요…… 역시 초대를 거절한 건지?
캐스터 공작 │그 사람의 시선은 이미 런디니움을 벗어나 있어. 내일 아침쯤이면 당신의 첩자가 나와 그의 대화 내용을 아침 식사로 올려놓겠지.
캐스터 공작 │그리고, 지금 그의 모습은 가울을 집어삼켰던 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고도딘 공작 │그건 빅토리아에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군요.
고도딘 공작 │타라와 '더블린'…… 빅토리아에서 이탈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현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죠.
고도딘 공작 │에버콘과 파이프는 큰 손해를 입었고, 더 큰 의사 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자발적으로 포기'했어요. 애시워스의 배후에 있떤 이들도 동란에서 거리를 두기로 했지요.
고도딘 공작 │노르망디 공작은…… 태도가 이미 확실하군요.
고도딘 공작은 미소 띤 얼굴로 '소공작'을 바라보았고, 엘레노어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도딘 공작 │아아, 세상 일은 참으로 무상하지요.
고도딘 공작 │예전에는 여기서 의회의 연회가 열리기도 했고, 알리스테어 폐하가 알현실에 앉아 계셨을 적엔 그분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자가 없었죠.
캐스터 공작 │훗.
먼지가 내려앉은 어두운 홀에 선 고도딘 공작은 마치 지난날과 같은 모습으로, 몸에 익은 리듬을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밟아나갔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음악은 멈추지 않는다. 햇살이 돔을 넘어 그의 몸에 쏟아졌다. 그 시절 고도딘 공작은 기개 있는 사람으로, 권력자나 귀부인들이 그의 파트너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며, 폐하도 그에게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그리고 그 후, 그 역시 다른 공작들과 손을 잡고 폐하를 교수대로 보냈다.
'소공작' │공작님은 어째서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을 그리워하시는지요? 그분의 후대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나요?
고도딘 공작 │하하, 그도 그렇군요. 빅토리아에 국왕이 없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소공작' │……
고도딘 공작 │'시즈' 씨,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까진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고도딘 공작 │감염자, 난민, 그리고 골칫거리…… 살카즈들. 당신이라면 더 나은 방식으로 머릿속의 생각을 실현할 수 있을 겁니다.
고도딘 공작 │……'의장님'.
비나 │그건 '제국의 의지'가 보내는 통보인가?
캐스터 공작 │그저 시도일 뿐이야. 폐허가 되어 가는 이 도시를 처리할 방법은 그 외에도 많지.
캐스터 공작 │그 자리는 종신직도 뭣도 아냐. 당신이 적합한지 여부는 우리가 판단하겠지.
비나 │과거와 똑같이…… 말인가?
비나 │너희가 말하는 그 '식탁 위의 의회'에 의지해, 몇몇 공작들이 왕의 곁에 모여 춤을 추며 나라의 미래를 결정했었지.
비나 │그런데 결과는? 밖을 봐. 살카즈의 피를 아직도 완전히 닦아내지 못했어.
캐스터 공작 │자네가 본 것은 이 작은 도시뿐이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빅토리아 전체야.
캐스터 공작 │만약 런디니움이 빅토리아를 약화시키는 고름이 된다면, 도려내는 것도 나는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야.
캐스터 공작 │빅토리아가 피 흘리는 모습을 다른 나라들이 보는 것까지는 허용할 수 있지만, 그 그로테스크한 흉터를 남들이 비웃게 둘 수는 없어.
캐스터 공작 │하수구에 서 있으면 이 오랜 제국의 전모는 볼 수 없어. 잊지 말도록. '빅토리아'라는 성은…… 내게도 그렇게 먼 것이 아니야, 알렉산드리나 전하.
캐스터 공작 │강한 자와 영웅만이 제국의 진로를 거머쥘 힘을 가지는 법이야.
고도딘 공작 │미래의 친구를 위협할 필요가 있나요, 캐스터 공작.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모인 게 아니겠습니까?
고도딘 공작 │웰링턴은 중심지에서 떨어졌고, 윈더미어령은 소란이 끊이지가 않지요. 그 외에도 우리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도딘 공작 │이 건은 모처럼 우리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으니, 좀 더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공작'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하지만 비나 씨,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가 전부는 아닙니다.
고도딘 공작 │하지만 그것이 '의장은 반드시 왕좌에 앉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엘레노어.
비나 │……할 말은 끝났나?

그녀가 검을 뽑자, 홀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캐스터 공작 │……
고도딘 공작 │……
'소공작' │……
비나는 그 비밀회의의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느꼈다.
그것은 런디니움의 미래를 결정짓는 회의였고, 런디니움 시민들은 그 모든 것을 알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기록하려 했다.
하지만 비나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 여유로이 떠드는 바보들에게 검 끝을 겨누었을 때……
그 바보들을 모조리 단칼에 베어버리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기만 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들이 변할 테니까.
비나 │선생님이 말했지. '왕의 숨결'은 한때 반란을 일으킨 권력자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비나 │……아니, 이제는 '왕의 숨결'이라 부를 수도 없겠군.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비나 │내겐 이것에 이름을 붙일 자격조차 없어. 이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니까.
비나 │원래라면 전장의 진흙 속에서 잊혔을 때, 사명은 이미 끝난 것이라 생각했지.
비나 │하지만 모든 걸 잃은 영웅들은 여전히 이 검을 기억하고 있었어. 이건 그들 마음속 '빅토리아'이고…… 빅토리아를 다시는 먼지 속에 묻어두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캐스터 공작 │……
비나 │그들이 이 검을 내게 보낸 진짜 이유는 알고 있어. 자신들을 대신하여 이 검으로 심판해 주길 바라는 거야…… 진정으로 그들에게 재앙을 초래한 자들을.
비나 │하지만 너희 중에는 이 검을 두려워하는 자가 없지. 아닌가?
비나 │너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이 검이 아니야.
비나는 검 자루 양쪽에 새겨진 문양을 천천히 훑었다. 그 문양은 장인이 특별히 새긴 것이었다.
망치 하나, 그리고 칼 한 자루가 빛나고 있었다.
비나 │……"검 끝이 영원토록 빛나면, 빅토리아에도 영원한 영광 있으리."
비나 │그들은 나에게, 이미 너덜너덜한 이 검을 다시 벼릴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 간청했다…… 내 망치를 주재료로 해서 말이지.
비나 │검을 다시 벼린 후, 그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이것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들에게 그 어떤 약속도 해줄 수 없었어. 국왕이니 의장이니, 그런 건 내게는……
비나 │……쓰레기나 다를 게 없었어. 나와 그들 사이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나 역시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일 뿐.

비나 │……
비나 │하지만 집에 돌아온 다음에는? 내가 본 것은 무엇이지?
비나 │그래. 내 눈에는 너희가 보는 그 '웅대한' 빅토리아가 보이지 않아.
비나 │하지만 난 볼 수 있어. 복싱장의 감염된 아이도 복싱을 배워 고향을 지키려 하고, 이가 다 빠진 주정뱅이조차 수술대 위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땅속에 숨겨둔 독한 술을 기꺼이 병원에 내놓지.
비나 │제국의 영광은 우리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추운 새해에 우리의 딱딱한 침대를 따뜻하게 데울 수조차 없을 만큼……
비나 │이 검은 그들이 내 손에 맡긴 책임이다. 의회나 왕권 따위 없어도,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어……
비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쥐고 있는 힘을 보게 하고, 자신의 영토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다!
비나 │그날까지, 어떤 신분이든 나는 그들 앞에 서야만 해.
비나 │하수구 속에서도 꽃은 피어날 수 있다. 그러니 적어도 이곳, 내 집에서는……
비나 │아직 네놈들에게 배울 처지는 아니다!
비나가 검을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검 끝은 아무 저항 없이 돌바닥을 뚫고, 공작들 앞에 세워졌다.
모두의 시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검으로 쏠렸다. 그들은 이것이 비나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검'과 '기적'은 그 전쟁 이후에 이미 굳게 이어져 있었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선왕의 핏줄이 아닌, 비나의 또 다른 신분이었다.
고도딘 공작 │하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지금 이 검이 우리 손에 들어와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고도딘 공작 │역시 직접 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멋진 검에 상처라도 나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고도딘 공작 │당신의 선생이 확실히 실용적인 것을 가르쳤군요. 아무래도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한 모양입니다, 캐스터 공작.
캐스터 공작 │그렇군. 방식은 서투르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해. 의회를 통해 더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 거야.
비나 │*빅토리아 비속어* 잠깐……
캐스터 공작 │우리에게 선택지는 없어, 시즈. 찢어져 버린 빅토리아에는 새로운 목소리가 필요하지. 그리고 그 역할을 자처한 건 너야.
캐스터 공작 │하지만 나는 지금껏 자신의 검에 죽어간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왔지. 그래서 그 검을 손에 쥘 것인지 신중했던 것이고.
캐스터 공작 │그 검에 베이거나 다치지 않도록 말이야, 의장. 이건 내 충고야.
▶- 여러분, 비나는 당신들 생각보다 냉정한 사람이야.
- 아무래도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네, 비나.
비나 │박사?!
'회색 모자' │죄송합니다. 그……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Mon3tr │(지루한 듯 으르렁거린다)
캐스터 공작 │일단 물러나도록.
- 지금 런디니움은 모두를 지켜줄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해.
- 다른 자들은 신뢰할 수 없어.
비나 │박사……
▶- 물론 최종 결정권은 네게 있어.
- 로도스 아일랜드는 도시 내 감염자 대응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어.
캐스터 공작 │흥미롭군. 광석병 전문 의료 회사가 자신들과 무관한 일에 이렇게 손을 뻗다니.
캐스터 공작 │당신들은 공작 연합군을 거치지 않고 살카즈와 휴전 협정을 맺었지.
- 각 공작의 함대는 그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어.
▶- 당신들은 묵인했어, 아닌가?
캐스터 공작 │선물이라고 치지. 당신들이 전장에 기여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캐스터 공작 │하지만 적당히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야.
고도딘 공작 │시즈 씨, 우리는 당신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도딘 공작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 그동안은 줄곧 조심스러운 태도이더니, 이제 와서 그렇게 급해질 필요가 있었는지?
- 시간은 때때로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는 법이지, 공작 나리.
고도딘 공작 │……호오? 시간입니까……
'소공작' │비나 씨, 당신이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시죠.
'소공작'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린 뒤에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하지 않도록 하세요.
- 우리와 노르망디 공작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소공작' │그게 바로 제가 비나 씨에게 충고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로도스 아일랜드의 '박사'.
- ……
비나 │……저 사람은 다른 공작들과 조금 다르군.
비나 │박사,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 마음속으로는 이미 답을 내렸잖아, 비나.
- 로도스 아일랜드가 이 이상 런디니움의 일에 개입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 아미야는 이미 카즈델로 출발했어.
- 로도스 아일랜드는 곧…… 대부분 런디니움에서 철수할 거야.
ˇ
시네셀드 의회실
1098년 12월 8일 5:01 P.M.
롱샷 │바벨이 내 형제들을 데리고 떠난 지도 꽤 됐군…… 그동안은 우리에게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어.
롱샷 │쳇, 죽여라. 더 할 말은 없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벤치에 불편하게 앉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 장소는 그에게 족쇄를 채웠고, 그의 운명을 결정지으려는 이들에게도 공평하게 족쇄를 채웠다.
불과 얼마 전, 비나는 성왕궁 서쪽 회당을 의회 업무에 재사용하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왕실이 과거에 빌려 썼던 이 건물을 선택했다.
비나는 이곳이 새로운 의회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델핀 │비나 씨, 조사가 끝났어.
델핀 │롱샷, 용병 출신, 카즈델 '흉터의 상점'이라는 곳 출신이야. 전쟁 중에는 군사위원회의 됫 내 방위업무를 담당했고, 전선에 나간 적은 없어.
델핀 │두 달 전에 바벨이 군을 철수했지만, 그는 떠나지 않고 현지 살카즈의 철수를 비밀리에 도우려다 인드라 씨와 다그다 씨에게 붙잡혔어. 당시엔 비나 씨가 그를 눈감아 줬고.
비나 │나는…… 기억나지 않아.
롱샷 │훗.
델핀 │이번 범죄에 대해 단서를 추적하던 중에, 그가 숨기고 잇던 사람을 발견했어.
델핀 │그의 딸은 지난 두 달 동안 살카즈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돕고 있었어. 그리고 이번에는 그 딸도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중 하나였지.
롱샷 │*살카즈 비속어*!
델핀 │알고 지내던 상인을 다치게 한 것은, 그들에게 물자를 조달하고자 했던 것이겠죠. 아닙니까?
롱샷 │아아아악!!
비나 │제압해!
델핀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롱샷 씨. 당신이 신경 쓰는 그 사람들은 조금 전에 도주했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빌려주는 자가 있더군요.
델핀 │'밀스카'. 이 이름을 알고 있겠죠?
델핀 │그들의 '사업'이 결국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까지 손을 뻗었습니다.
롱샷 │……하, 하하.
롱샷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걸, 필라인. 이제 날 죽여도 좋다고.
비나 │……
롱샷 │내 피가 이 깨끗한 곳을 더럽히는 게 걱정되는가?
롱샷 │전쟁은 이제 막 끝났을 뿐인데, 네놈들은 벌써 피를 보는 게 두려워졌나?!
롱샷 │여기 앉아 있는 놈들 모두, 네놈들이 빅토리아 출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살카즈보다 더 비열한 놈들이다!
델핀 │……나머지는 내게 맡겨줘.
비나 │알겠어.
ˇ
쉰 목소리 │최근 도시 일 관련해서 공작님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있었나?
상냥한 목소리 │공작님께서는 살카즈와 '밀스카'와 관련된 문제를 일찍이 알고 계셨으며, 시민들의 안전을 무척 염려하고 계신다.
상냥한 목소리 │다만 지금 의회에는 모든 의원이 자리해 있고, 의장님께서도 시민들을 위해 문제 해결에 매진하고 있지. 때문에 공작님께서는 상황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 믿고 계신다.
상냥한 목소리 │다만……
쉰 목소리 │다만?
상냥한 목소리 │다만 런디니움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배제하는 것은 결코 늦춰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계신다. 특히 '밀스카'에 대해서는.
상냥한 목소리 │그러니 모두들 의장님께 하루빨리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재촉해 주길 바란다.
ˇ
'밀스카' 은신처
1098년 12월 8일 6:06 P.M.
귀찮아하는 용병 │보스, 그 마족은 의회에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만, 의뢰한 물건은 되찾았습니다.
귀찮아하는 용병 │이 물건들은……

'밀스카' │보내줘.
귀찮아하는 용병 │하지만 보스…… 지금은 너무 위험합니다. 의회 놈들이 우리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요.
'밀스카' │물건은 잠깐 숨겨 둬. 이미 대금 지불은 끝났으니까, 우리는 물건을 보내는 일에만 집중하면 돼. 다른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귀찮아하는 용병 │어차피 이 물건의 존재를 아는 놈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용병이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하자, 턱 부근에서부터 돌연 날카로운 통증과 냉기가 느껴진다.
귀찮아하는 용병 │보, 보스, 저를 죽여도 좋습니다만, 이게 최선의 처리 방법이라는 것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귀찮아하는 용병 │그 마족 놈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형제를 잃었는지 아십니까?!

'밀스카' │진짜로 그걸 신경 썼다면, 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파라곤 부대의 퇴역 명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겠지.
'밀스카' │……하지만 신중히 움직여야 하는 건 맞아. 새 의장이 도시의 안전을 이렇게나 염려하고 있으니까, 그 화살 끝에 서게 될 것은 살카즈를 제외하면 우리 정도지.
귀찮아하는 용병 │흥, 하지만 그것도 마족 놈들의 자업자득 아니겠습니까.
'밀스카' │두 달 전 대부대가 철수할 때 안 가고, 정세가 불안해지니까 이제 와서 떠나려고 하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당연하지.
'밀스카' │안심해. 이번 건만 잘 풀리면, 자연스럽게 새 일도 많이 들어올 테니까.
ˇ
퇴역한 여병사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어떻게 됐어요? 구했어요?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요양소가 사람들로 꽉 찬 데다가 다들 앞다투어 억제제를 구하고 있어. 거기에 메이저 님 건도 있으니……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미안하다, 다이앤. 파라곤 부대라고 해도 그러 특권은 없어서 말이야.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우리와 계속 협력해 온 로도스 아일랜드도 억제제 공급에 힘쓰고는 있다만, 감염자가 너무 많이 늘었어……
다이앤 │네…… 알고 있어요.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으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전우에게서 뒷거래 루트가 있다고 들었어……
다이앤 │……불법적인 건가요?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며칠이라도 더 살수만 있다면……
??? │약을 구할 수 있는 다른 경로가 있었나요? 윽, 경쟁자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흥, 뭐 잘못 들은 거 아닌가?

??? │이런, 실례했습니다. 컬럼비아에서 급히 오느라 피로가 쌓였나 보네요. 반갑습니다, 엘리시오라고 합니다 여기, 제 명합입니다.
다이앤 │컬럼……비아? 적심 의료?
엘리시오 │네, 제가 이번에 런디니움에 오게 된 건…… 으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리스트 좀 확인해 보겠습니다……
엘리시오 │런디니움에 온 이래로 제가 보게 된 상황은, 대부분 사전에 받아본 자료랑 많이 다르더라고요.
엘리시오 │아, 여기 있네요. 런디니움 임시 공공위생 행정관…… 메이저 씨. 혹시 임시 물자 조달 사무실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엘리시오 │안심하세요. 저는 적심 의료를 대표해서 의약품 협력에 관해 논의하러 왔습니다. 여러분의 상황도 곧 호전될 거예요.
다이앤 │……
부상당한 파라곤 부대 병사 │……
엘리시오 │……에, 음,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다이앤 │소식 못 들으셨어요? 메이저 님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다이앤 │죄송합니다.
엘리시오 │……?!
엘리시오 │면목 없습니다. 실언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하든, 적심 의료의 진심과 약속은 변치 않을 겁니다.
엘리시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저를 임시 물자 조달 사무실로 안내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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