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서술하고,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감정은?
PART 1 이미 잃어버린 것들은 어디에서 다시 찾으면 될까?
로렌티나는 먼 곳에서 흔들리는 등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온 괴물들은 이미 물리쳤고, 또 하나의 에기르 도시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물론, 일시적일 뿐이지만. 눈 앞에 펼쳐진 재난 아래, 변함없는 것은 오로지 죽음과 고통뿐이다. 구조상으로 보아 그곳은 세월의 광휘가 깃든 오래된 도시 같았다. 비록 거리가 멀지만, 돔 아래 건물들의 위세와 오만함이 아련하게나마 눈에 들어왔다.
그 치욕스러운 배반 이후, 어비설 헌터스는 더 이상 도시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더 '원시적'인 이들은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물리쳤지만, 그들에게 더는 고향이 없었다.
아니, 고향이 존재하지 않았다.
로렌티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녀도, 그녀의 대장도 이 혈맥 속에서 박동하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정해진 죽음을 앞두고 있다. 아니, 어쩌면 더 비참할지도 모른다. 죽음은 이미 시작됐고, 그녀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끝없이 이어지는 부패를 꾹 참고 견디는 것뿐이다.
로렌티나는 여전히 그 에기르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는 다시 움직이며 어디까지 물러섰을지 모르는 방어선을 향해,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운명을 향해 나아갔다. 그 희미했던 등불마저 점점 사라져갔다. 깊은 바닷속, 햇빛은 그저 머리 위 수천 미터에 떠 있는 아련한 그림자일 뿐,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무도 느낄 수 없었다. 로렌티나의 주변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로렌티나는 물줄기의 변화를 느꼈다. 그녀의 대장이 떠나고 있다. 글래디아는 벌써 몇 년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싫어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쌓아온 둘만의 호흡으로 더 이상의 대화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 부패가 완전히 끝나는 날까지 그녀들은 이렇게 지낼 수밖에 없다.
이들의 관계를 '신뢰'라고 표현하기엔 다소 경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원래 어비설 헌터스의 피는 서로 이어져 있으니까.
그저 이 관계의 종점을 그녀들은 수도 없이 봐왔고, 말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나 멀지 않았다. 어쩌면 두 달 뒤,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른다.
로렌티나는 다음 정비 때 새로운 톱날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결한 것들이 다시 몰려온다. 로렌티나는 이 춤이 끝날 때까지 미래의 가능성에 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다짐했다.
PART 2 진실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이 누군가의 의도로 수포가 되었을 때, 과연 계속 파헤쳐야 할까?
한 번 또 한 번의 무도회, 그러나 파트너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선택했다.
로렌티나는 싫증을 느꼈다. 이건 진정한 무도회라고 할 수 없다. 물속에서 녹아버린 잔해, 귀청을 찢는 듯한 노랫소리.
이는 놈들의 노랫소리다. 로렌티나는 그 우아함을 인정했지만, 그녀의 스텝을 따라올 정도는 아니었다.
마지막 파트너마저 산산조각이 나자 녀석의 발광 기관도 점점 빛을 잃어갔고, 익숙한 어둠이 다시 찾아왔다. 바다의 밑바닥에서 파도를 느끼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바다의 무게를 느꼈다. 이게 과연 평온이란 말인가? 로렌티나는 곤혹스러웠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평온이란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거나, 다른 노랫소리와 어울려야 하는 게 아닌가?
좀 더 따스하고, 좀 더 느긋한 것으로……
그건 어떠한 멜로디였을까? 로렌티나는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녀석들의 합창이 자꾸만 귀에 거슬렸고, 잔물결마저 짓눌려 버렸다. 오직 놈들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이때 아련한 그림자가 로렌티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평온……
그게 평온인가? 아니면 공포?
로렌티나는 몇 걸음 다가가더니 발끝을 바짝 세워 몸을 회전했다. 양팔은 유달리 가벼웠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다시 몸을 회전했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춤은, 과거 누군가와 함께 췄던 게 아니었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서툰 파트너였다. 그래도 눈앞의 녀석들보다는 훨씬 나았으니.
기억, 기억이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로렌티나는 자신이 원하는 기억을 찾기 위해 그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했다.
기억을 찾아낸다고 달라질 게 있나. 그녀는 기억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정해진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보다 더 혐오스러우니.
다음 곡을 출 시간이 온 것일까, 놈들의 노랫소리가 더욱 커졌다.
노랫소리에 따라잡히고 싶지 않은 로렌티나는 드레스를 정리했다. 그리고, 파트너들이 입장했다.
PART 3 허무 속에서 해방된 그 모습은 누구의 모습이었을까?
그건 정말로 예쁜 바위였다. 새하얗고 반듯하며 부드러운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는 게, 마치 정성스럽게 만든 디저트를 조심스럽게 파도 밑에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여기는 너무나도 좋군요.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혼자 오랜 시간을 걸었다. 무너진 잔해를 지나, 끈적한 살점을 넘어, 노랫소리를 뚫고, 죽음을 거쳐.
마침내, 그녀는 그 바위 앞에 도달했다. 이건 아마 우연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기나긴 여정의 종착지를 전혀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최고의 순간은 늘 이렇게 예기치 않게 찾아오니.
그녀는 다가가 바위를 어루만졌다. 그녀가 예전에 익혔던 지식은 그녀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이미 어두운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감정은 아직 거기에 남아 있었다. 이미 설명을 포기했던 감정이 그녀의 희미하게 떨리는 두 손안에 어김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떨림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바위를 쓰다듬으며 희미한 온기라도 느끼고 싶었지만, 결국 손에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온도에 대한 감각을 잃고 있었다. 손끝으로 조금은 거친 느낌이 전해졌다. 이건 마치 영원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굉장한 돌이다.
아득한 시간 저편의 어느 오후, 그녀도 이렇게 어떤 바위를 쓰다듬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세월에 저항할 수 있는, 소멸에 저항할 수 있는,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종말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운명이 소원을 이루지 못한 게, 어떻게 보면 또 일종의 저항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연결.
과거 자주 입에 오르내리던 이 단어가 이미 기억 속에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바랬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된 사람이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때가 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는 가볍게 팔을 들어 올렸다. 한때 무기라 불렸던 물건은 이미 썩어버려 잔해만 남았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일을 해내기에 충분했다.
바위가 조금씩 깎여나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그녀는 눈을 감았다. 드디어 완성되었다.
그녀는 형체 있는 물건 속에서 허무를 해방했고, 자신의 운명을 허무로 돌려보냈다.
파도가 밀려와 온갖 흔적을 데려갔다. 모래 위의 그 커다란 바위와 그 그림자도 모두 파도에 씻겨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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