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감상하고자 한다.
PART 1 그 출발점에 맞서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들에 맞서라
켈시의 키는 그녀보다 약간 작았다.
걸음걸이도 살짝 느렸고, 말투도 차가운 편이었다.
글래디아는 곁에서 그녀가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충고, 경고, 그리고 가르침. 그들은 비록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지만, 켈시가 보여준 모든 것은 그녀의 강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강함'? 글래디아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여러 가지 형태의 힘을 봐 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직설적인 것은 바로 자신의 등에 걸려 있는 창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에기르의 경치가 떠올랐고 바다를 가득 메울 정도의 함대가 떠올랐다. 전사들의 눈빛은 햇빛마저 뚫을 수 없는 심해를 불태웠고, 위대한 과학원에서는 지식의 울림이 전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불가피하게, 웃기지만 또 한편으론 서글프게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강함'.
글래디아는 이상한 연상을 멈췄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켈시는 침묵하면서 글래디아가 다시 정신을 가다듬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글래디아는 그런 켈시를 바라보면서 자조하듯 웃음을 지었다.
"계속하시죠, 선생님. 방해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군.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나는 집중하지 않는 집정관과 아까의 화제를 이어 나갈 수 없어."
켈시는 잠시 멈추더니 "시본의 기원에 관해서 말이야." 라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글래디아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가 그녀에게 소위 '임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단 몇 마디 말로 지시했는지 떠올랐다. 그때, 과연 어머니는 글래디아의 눈치를 살폈던 걸까?
켈시의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글래디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에 대한 감정. 육지에서 살다 보니 그녀는 부득이하게 그 감정을 다시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핏줄이 아닌 연결고리, 그중에는 더욱 복잡미묘한 색들이 담겨 있어 마치 바람 때문에 휘몰아치는 산홋빛 소용돌이 같았다.
무의식 속에서 글래디아는 그 소용돌이로부터 탈출한 지 이미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도 지금까지 그런 가냘픈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으니. 동경? 추앙? 존경? 공포? 아니면 원망과 혐오? 이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진정으로 벗어났는지다. 그녀는 그저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단지 경치만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갈 뿐.
하아, 에기르.
성격, 태도, 또는 '인성', 그녀의 모든 것은 에기르가 만들어낸 것이다. 정확히는 그녀의 가정이 만들어낸 것이다. 불현듯 글래디아의 머릿속에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 집정관으로서, 어비설 헌터스로서 그동안 대의를 위해 싸워왔지만, 그녀는 이 대의의 정확한 원점을 여태 찾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집정관, 휴식이 필요한가?"
"글래디아,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켈시는 고개만 끄덕였고,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동료를 찾고 있나 보네. 함께 나라를 구할 동료를."
"맞습니다."
"너에겐 새로운 동료가 필요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견은 일치하지만, 네가 찾고 있는 게 그것만이 아닌 것 같군."
글래디아는 놀라움을 가슴 깊이 눌러두었다. 그녀는 자기 생각을 잘 숨기는 편이다. 아무리 그녀가 가장 가혹한 태도로 그토록 미워하던…… 자기 자신……을 대할 때도 그녀는 얼굴에 자기 생각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켈시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으나, 글래디아는 의외로 그녀의 눈빛에서 자신을 외면하고 있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당신의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젠 제가 에기르의 현황을 말씀드리죠…… 그리고 총전쟁 설계사의 계획도."
"켈시야."
"그래요, 켈시." 글래디아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선 한 어머니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죠." 라며 말을 이었다.
PART 2 자신을 황홀하게 하는 그림자에 맞서고, 그 오만과 배려에 맞서라
기사.
글래디아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자칭 기사라는…… 카시미어 사람을 여럿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역사는 그리 복잡하지도 않다. 그건 단지 쿠란타의 군사적 전통과 가소로운 소비문화가 충돌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사라는 단어를 해석해 본들, 눈앞에 있는 이 기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베리아 전사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번 집정관에게 진격을 요청했지만, 글래디아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 두 시본은 조금 특별합니다." 재판관이 말수가 적은 집정관을 대신해 말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만만치가 않죠.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
살아남은 전사들은 적어도 한 번은…… '마지막 기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글래디아는 이베리아에서 처음 그를 만났던 장면을 떠올렸다.
바다는 이렇게 넓고, 적은 부지기수인데 똑같은 시본을 계속해서 만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게 아니라면…… 카시미어의 작은 마을에서 온 그 열쇠가 모든 사람의 운명을 한데 묶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설마 이 만남도 단지 우연의 일치란 말인가?
하늘엔 먹구름이 짙게 깔렸고 바람엔 심해의 썩은 내가 섞여 있었다. 기사는 그의 가장 충실한 호종과 함께 해수면에 엎드려 바다의 호흡과 함께 넘실거렸다.
글래디아는 늘 이 일이 신경 쓰였다. 만약 기사와 그의 탈 것이 교회의 쓰레기들 같이 타락해버린 인간이라면,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어지럽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교회의 쓰레기보다 더 깊이 타락해버려, 심지어 위매니에 가까워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위매니의 염원을 무시할 수 있었고, 또 동포의 요청도 무시할 수 있었던 걸까?
글래디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비인간적인 물체에 동정을 느꼈던 걸까? 어째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평등한 생명체로 대했던 걸까?
빌어먹을,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갑자기 한 갈래의 벼락이 내려치면서 글래디아를 현실로 끌어왔다. 그녀는 불안한 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나빠 시야가 점점 열악해지고 있군요." 그녀는 아까 그 이베리아 전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씨가 예사롭지 않아요……"
또 한 갈래의 벼락이 내리치자 해수면은 갑자기 탁해지기 시작했다. 그 어떤 육지의 태생 동물이라도 이 칠흑 같은 바다 앞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사들은 식은땀을 흘렸고, 글래디아의 주변은 사적에 휩싸였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미약한 햇살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바다에는 괴이한 정적만이 흘렀다.
기사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글래디아는 왜 그가 얼마 안 남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붙잡고 '바다의 파도'에 그토록 분노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설마 일종의 은유인가? 위매니 그 자체를 말하는가? 아니면…… 이샤믈라?
그것도 아니면……
글래디아는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뒤늦게 알아차린 재판관은 이 엄청난 속도의 어비설 헌터스를 따르라고 전 함대에 명령했다.
거의 같은 시각, 기사도 고개를 들었다. 집채 같은 파도가 수평선 너머에서 소리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기사는 파도를 향해 돌진했다. 한 파도를 뚫고 지나자 기사는 넘실대는 다음 파도를 바라보았다.
글래디아는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는 문득 이 마지막 기사의 행동이 아무런 논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직 집착과 투쟁이라는 순수한 생각으로 바다의 모든 것을 부숴버리려 할 뿐이다.
그녀는 물론, 심지어 바다의 파도까지도.
글래디아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과거 울피아누스가 해줬던 충고가 떠올랐다. 집정관으로서 이런 모습은 좋은 것이지만, 전사로서 이것은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마지막 석양이 파도에 삼켜지는 순간, 그 희미한 빛이 반짝이는 찰나, 글래디아는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어쩌면 그녀의 삶에 늘 이러한 모습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절대 시본이 될 순 없다.
PART 3 자신에게 맞서고, 죽음을 찾아라
몇 분 후, 글래디아는 한 가지 사실을 인지했다. 그녀는 이미 더 이상 헤엄칠 수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바다 밑에 앉아 피부에 스며드는 수압을 느끼고 있었다. 온기가 그녀의 피부를 살며시 스쳐 지났다.
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고향의 그 도시가 떠올랐고, 어릴 때 처음 봤던 간호 로봇이 떠올랐으며, 기억 속 흐릿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샤믈라의 목소리가 드디어 사라졌다. 기나긴 투쟁, 수백 수천 년 동안 에기르를 괴롭히던 난제와 전 테라 문명의 최대 위기가 그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신…… 동시에 자신의 가장 사랑스러운 동료이기도 했던 전우의 죽음과 함께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이곳에 살아남은 건 오로지 집정관 한 명뿐이다.
마지막 순간, 울피아누스는 생존의 기회를 더 젊은 글래디아에게 남겨주기로 했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는 집정관의 개인 정보를 확인할 사람도 아니고, 글래디아와 장유를 논한 적도 없었다. 기나긴 전쟁이 끝나는 이 순간, 여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던 글래디아는 진정 처음으로 긴장을 풀어볼 마음이 생겼다. 아…… 그녀는 아마 울피아누스를 이해하려고 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로렌티나, 스카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줄곧 에기르로서, 어비설 헌터스로서, 동포로서, 전우로서 서로를 대했으니.
하지만 그들의 냄새는 이미 사라졌고, 마지막 함대도 바다에 침몰했다.
글래디아는 웃었다. 그녀도 물론, 이 결말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기에.
끝없는 희생과 파멸이 있었지만, 노랫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위선적인 신은 하나가 아니었고, 멸망의 발걸음은 멈춘 적이 없었다.
울피아누스의 말이 맞았다. 스카디도 어쩌면 인간성이 흐려진 순간에 모든 사람에게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글래디아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했고, 전에 없었던 가치와 의미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 멸망이 확정된 게임에서 그녀는 자신이 석연해질 방법을 선택했다.
잠깐의 휴식 후, 그녀는 시테러의 살점을 뜯어내 피가 흐르는 상처를 간단하게나마 처리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위매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이 칠흑 같은 바다 밑에서 자신을 위해 생물이 낼 수 있는 형광색의 불빛을 밝혔다. 그녀 주변 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시본들이 마치 성지순례 하는 승려처럼 기괴한 촉수를 거두고 묵묵히 글래디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매니는 그녀의 귀순을 바랐고, 그녀가 저항하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녀가 더 이상 무의미한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 또한 위매니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죽음이란 반드시 허무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와 위매니의 차이다.
그녀는 이샤믈라가 잠든 곳을 바라보았고, 또 신이 깨어난 곳을 바라보았다. 글래디아는 알고 있다. 위매니는 동료의 물음에 반드시 대답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녀는……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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