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해답 없는 수수께끼를 준 것에 맞서 저항할 수 있을까……
PART 1 더 이상 부식된 마음도, 녹지 않는 빙산도, 만연의 가지도 없다.
더 이상 부식된 마음도, 녹지 않는 빙산도, 만연의 가지도 없다.
완전히 폭주해버린 원초의 명맥은 이샤믈라와 미즈키가 싸우는 틈을 타 퍼스트본을 삼켜 버렸고, 그 이후 '존속'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일일이 자원으로 변환하며 포용과 관리를 충실하게 실행해 나갔다. 만물이 이토록 질서정연해졌던 적이 없다.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것들이 지워졌기 때문에. 바다는 순식간에 대지를 침범했고, 인류는 최후의 보루조차 건설하지 못한 채, 테라는 이미 시본의 이상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광활한 이상향의 한구석에, 한때 미즈키와 박사라고 불렸던 시본이 질서에 삼켜지는 것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계에서는 이름도 기억도 그리움도 모두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미야와 켈시…… 로도스 아일랜드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류에 또 다른 생존자가 있긴 할까? 이런 생각은 이미 사치가 되었고, 생각을 위해 영양과 자원을 배분할 권리가 주어지는 건 음식을 섭취할 때 정도뿐이었다.
'박사'는 미즈키가 방금 몸에서 잘라 낸 촉수를 말없이 뜯어 먹고 있었다. 처음에는 음식을 섭취하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오열하고 통곡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감정과 행위는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박사는 결국 극복해냈다. 어쩌면 이 폐쇄된 환경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침묵과 무감각으로 인해 마음이 완전히 닫혀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미즈키는 '박사'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살을 떼어 내 박사에게 먹이면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얼마나 가혹한 행위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박사의 죽음은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화초와 균류, 심지어 물마저 명맥의 일부로 개조된 지금, 이 세상에 그것이 만들어낸 질서를 상징하는 빛으로 반짝이지 않는 것은 없었다. 물론, 한때 동물이었던 바다 괴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 이상 정상적인 '음식'은 존재하지 않았고, 테라 전체가 빛나는 바다에 녹아 있었다. 미즈키는 남은 힘을 쥐어짜 자신이 섭취한 특수 조직을 단순한 영양분으로 바꾸는 데 간신히 성공했다. 말하자면, 미즈키만이 유일하게 남은 '안전'한 음식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사가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미즈키의 예상 밖이었다. 극도의 굶주림으로 인한 생존 본능이 일시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능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즈키의 눈앞에서 죽으면, 미즈키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준 목숨이 헛수고가 될까 봐 두려워서일까? 아니, 이유 같은 건 이제 상관없다. 박사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하지만 과연 이런 날들에도 끝은 올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미즈키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바랐다. "다른 세상에서는…… 박사가 자신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결말에 빠지지 않기를."
PART 2 미즈키는 그런 후회나 안도감을 거부했다. 그것과 그것의 힘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곧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여러 답을 얻게 될 것이고, 답이 나오기 전에 답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승화되어 있었고, 시간이 속박할 수 있는 건 그의 육체일 뿐, 생각은 아직 구속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들은 확률적으로 미즈키의 뇌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의 그것이 확률적인 존재로 미즈키와 공존하는 것처럼.
만약에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그 힘으로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차원에 묶여있는 한, 사고와 육체는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즈키에게 있어, 그 애매한 확률 앞에 있는 갈림길은 오직 선택을 한 후에야 선명한 기억의 형태로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줄 뿐이고, 그때가 되면 재선택이라는 가능성 따위는 이미 사라진 뒤다. 그런 것이 가져오는 것은 아마 후회나 안도감뿐일 것이다.
미즈키는 그런 후회나 안도감을 거부했다. 그것과 그것의 힘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만약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것 역시 미래의 일종의 가능성, 더욱이 본인의 원래 의도에 어긋난 가능성일 뿐이다. 이러한 결말은 확실히 인류에게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태어나게 한 가능성에 대한 선택은, 어쩌면 어딘가에 있는 자신과 박사가 어떠한 이유와 고충 때문에 내린 어쩔 수 없는 결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적대할 필요도 없고, 그저 다른 선택을 한 친구가 일이 끝난 뒤 막연한 참고 사례를 제시해 준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심지어 미즈키는 게임을 하는 와중에 번뜩인 아이디어로 그것에게 이름마저 지어줬다.
그리고 미즈키가 박사에게 그 얘기를 하고, 하마터면 현실이 될 뻔한 또 다른 가능성을 알려 주어 바다 이외의 난제에 함께 맞서게 되는 것은, 이미 수년 후의 일일 것이다.
PART 3 일부 시테러가 구름층을 계속 응시하기 위해 암석 같은 형태로 진화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떠한 사명일까?
볼리바르 어딘가의 아무도 모르는 해안가. 교묘하게 위장한 시테러 두 마리가 암초들 사이에 몸을 고정한 채 그저 마주 오는 파도를 맞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른 생물에 대한 적의는 없는 듯했고,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로도스 아일랜드는 컬럼비아 주변에 더 정박할 예정이었다. 그 사이 미즈키는 몰래 빠져나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체험할 수 없는 지역 문화와 특색을 즐기는 것 외에도, 이따금씩 이런 외진 곳을 찾아 무릎을 감싼 채 쪼그려 앉아 파도 소리를 듣거나 시테러들의 소리 없는 대화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너희들 지금 구름을 관찰해서 날씨를 판단하고 있는 거야?"
미즈키는 그 둘이 어떠한 방식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테러의 정밀하고 특별한 구조의 시각 기관이라면 구름 저 멀리까지도 관측할 수 있다. 미즈키는 이러한 관찰의 목적이 매우 궁금했다. 어쨌든 시테러들이 하늘에 바라는 것은 없을 테니까. 전에 하늘을 나는 걸 시도한 시테러가 있긴 했지만, 파울비스트는 종족을 먹여 살릴 풍부한 자원이 될 수 없었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 또한 바닷속 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날씨가 아니다. 우리는 관찰한다. 우리는 기다린다." 이 두 마리의 시테러는 그들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그래왔던 것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들의 직책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불필요한 발성 기관이 없으며, 존재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겐 동족에게 정보를 전달할 그들만의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구름층을 계속 응시하기 위해 암석 같은 형태로 진화했다면, 그것은 대체 어떠한 사명일까? 그 막중한 사명 뒤에 숨겨진 이유는 두세 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미즈키도 알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떠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하늘에는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쩍 갈라진 틈, 반짝이는 전리방사선, 심지어 본 적도 없는……
그들이 한 짓일까? 아니,이 시테러 두 마리는 저 멀리 떨어진 공간에 간섭할 힘이 전혀 없다. 그들의 기능은 오로지 관찰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 무엇을 했다는 건데? 무엇 때문에? 저쪽은 컬럼비아 아닌가? 아까 본 것은 도대체……
미즈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두 마리의 시테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황급히 동굴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될 시테러의 생존 전략을 개척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정보를 동족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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