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knights-Event/[S]허락받지 못한 땅

[허락받지 못한 땅] UR-6 교차 항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들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아직 서로가 왜 길을 떠나는지, 얼마나 더 날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작전 전

 

내스티 │……

 

바람이 젊은 밴시가 손에 든 나뭇잎을 향해 불었고, 그 사이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협곡 아이들의 목소리 │(살카즈어) 하나만 더! 하나만 더요!

베일라의 목소리 │(살카즈어) 양철 레인저 이야기해줄까?

베일라의 목소리 │(살카즈어) 그 사람은 우리 협곡에도 온 적이 있지. 지금 안개 호수에 깔린 짙은 안개도 처음엔 그가 피우던 커다란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거란다……

내스티 │……

라케라말린의 목소리 │(살카즈어) 이렇게 하면 깃뿔을 오므리고, 그대의 두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파닐의 목소리 │(살카즈어) 낮에 잘 때 안대로 쓰는 건가요?

라케라말린의 목소리 │(살카즈어) 물론 아니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담담하게 엮어 엘레지로 만들기 위해서란다……

 

또 한 단락의 소리가 끝나자, 젊은 밴시는 잎사귀를 품에 넣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순식간에 경계의 기색이 차올랐다.

 

내스티 │계속 엿들으면, 콘크리트 믹서기에 던져버린다.

 

크리스틴 │방금 그거…… 밴시의 주문이야?

내스티 │응.

크리스틴 │컬럼비아와 카즈델은 멀리 떨어져 있고, 너도 엄청 먼 길을 떠나온 거잖아. 동족의 목소리를 녹음해 가지고 다니며 계속 듣는 거야?

내스티 │향수병, 이해하기 어렵나?

크리스틴 │……어렵지는 않지만, 향수를 느끼는 사람 표정이 설계도를 볼 때 표정이랑 똑같은 건 드물어서 말이야.

크리스틴 │지금 밴시의 언어와 행동 패턴을 해석하려 하는구나. 왜? 종족이 수천 년 동안 겪어온 생존의 고난을 타개할 새 방법을 찾으려고?

내스티 │너……

내스티 │난 내가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내스티 │그냥, 걱정 많이 하는 사람이 남은 인생에서까지도 부담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뿐이지.

크리스틴 │이해해, 말은 달라도 결국 같은 뜻이잖아.

크리스틴 │그래서 뭔가 진전이 있어?

내스티 │그렇게까지 급한 건 아니라서.

크리스틴 │그 녹음을 수백수천 번은 들은 것 같던데……

내스티 │……

크리스틴 │똑같은 코퍼스에 빠져서 가라앉을 때까지 허우적거려봐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는 없어.

크리스틴 │시야와 사고의 한계가 우리를 '상식'이라는 늪에 익사시키고, 모든 것을 '운명'이라는 것으로 포장하지……

크리스틴 │나는 네가 그 점을 깨달아서 카즈델을 떠난 줄 알았는데.

크리스틴 │그 녹음을 지워. ……잔인한 조언이지만.

내스티 │일리 있네.

크리스틴 │안녕, 나는 크리스틴, 라인 랩의 총괄이야.

내스티 │내스티다.

크리스틴 │스터레이 건축 회사에서 새로 채용한 천재 엔지니어, 남들보다 3배는 빠르게 공정을 끝내는 밴시, 업계에는 네 도면에 주술이 깃들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지……

크리스틴 │라인 랩에서 엔지니어링과를 신설하려고 하는데, 혹시 관심 있어?

내스티 │어제 네가 사장과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 '라인 랩'은 바이오 테크를 다루는 기업이라면서?

크리스틴 │내스티, 고개 들어봐…… 저기 저 파울비스트들과 그 뒤의 별들이 보여?

크리스틴 │나는 그저 우리가 하늘을 돌파하게 해줄 힘을 찾고 있을 뿐이야.

내스티 │하늘……

내스티 │방금 네가 말한 것처럼, 이루려는 일이 상식을 넘어선 거라면, 거기에 필요한 힘도 우리 가까이에 있지는 않겠지……

내스티 │라인 랩이 신설해야 하는 건 과학조사과야.

크리스틴 │일리 있네. 그럼 그걸 엔지니어링과 주임이 회사에 해주는 첫 번째 조언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ˇ

내스티 │……

협회 멤버 │내스티 씨?

내스티 │곧바로 청문회장으로 가거나, 아니면 더 은폐되어 있는 감옥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지금 케이블카를 타려고 승강장에서 대기하는 걸 보니, 부유층 견학이라도 시켜달라는 건가?

협회 멤버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의 지시입니다.

내스티 │……

틴맨 │오랜만입니다, 내스티.

내스티 │……너였구나.

틴맨 │저도 막 도착했습니다. 여긴 참 멋진 곳이군요. 아직 절반밖에 못 둘러봤는데, 함께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스티 │그러지.

 

 

ˇ

틴맨 │……근데 왜 방금 우리가 지나온 구역에만 비가 내리는 거죠?

내스티 │클라우드 스튜디오야. 랭크우드에서 실시간으로 하늘을 연출하는 시스템을 개발했지. 5분만 더 있으면 오로라도 볼 수 있어.

틴맨 │100년 전, 요즘 사람들이 촬영의 아버지라 부르는 그 친구가 촬영장에서 제게 이런 말을 했었죠. 언젠가는 정말 한르 위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틴맨 │솔직히, '하늘 열풍'이 정말 촬영 기술의 혁신까지 끌어낼 줄은 몰랐습니다.

틴맨 │여긴 정말 활기차네요, 내스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삶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컬럼비아 사람들의 창의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스티 │지금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다는 게 뜻밖이군.

내스티 │특별구 정부가 제정한 '프로펠러 파라다이스' 관리법에 따르면, 관련 부처는 긴급 사건 발생 후 12시간 안에 반드시 청문회를 열고, 조사 결과를 처리 및 공시해야 할 텐데.

내스티 │고든이 라인 랩 생태원에 침입해 우리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망가뜨렸고, 덤으로 몰래 해오던 더러운 거래까지 세상에 드러났지.

내스티 │정황 증거는 이미 차고 넘쳐. 그런데 너희들은 파크에 진작 도착해놓고도 계속 청문회를 미루고 있지……

틴맨 │미룬 게 아닙니다, 내스티.

틴맨 │2년 전만 해도, 컬럼비아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구름과 거주권을 두고 다투게 될 날이 올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죠.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틴맨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이미 컬럼비아 전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됐고, 특별 섹터 명단에서도 첫 페이지로 이동했죠.

틴맨 │잠깐 시간을 내서 케이블카에 올라타 주변 시설을 둘러보고, 등록센터 입구를 막고 있는 각 기업의 대표들을 보시죠……

틴맨 │이 모든 것이 청문회가 우리에게 어떤 결론을 요구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스티 │……

틴맨 │쯧,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라니. '파라다이스'는 하늘에 오르고자 하는 열망을 상징하고, '프로펠러'는…… 절대 멈추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죠.

틴맨 │밀수 네트워크가 드러났고, 총장을 필두로 100여 개의 기업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지난 반년간, 이 파크의 과학 연구에도 상당한 규정 위반 행위가 있었죠…… 이걸 전부 파헤치면, 전시회는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틴맨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내스티. 청문회는 반드시 열려야 하고, 그동안 발생한 모든 사고도 반드시 해명이 필요하죠……

내스티 │하지만 형식에 불과한 해명이겠지.

내스티 │우리 '라인 랩'이 그 적당한 해명거리라는 거잖아?

내스티 │뭐, 이 '하늘 열풍'도 트리마운츠의 그날 밤에서 비롯된 거니까. 이미 전과가 있기도 하니까, 라인 랩이 재범이라 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테고.

틴맨 │훗, 당신은 소문처럼 묵묵히 케이블만 연결하는 그런 기술자는 아니군요.

틴맨 │하지만 라인 랩도 마냥 억울하다고는 할 수 없죠, 안 그렇습니까?

틴맨 │출처가 불분명한 그 '나무'는 아직도 하늘에 떠 있습니다. '플랜터 유닛' 같은 변명 말고, 대체 뭘로 설명할 겁니까?

내스티 │……

내스티 │그 말은, 굳이 청문회장에 갈 필요도 없다는 거네? 어차피 너희들은 이미 결론을 내렸으니까.

틴맨 │……미안합니다, 내스티.

 

크리스틴……

내스티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지만, 나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크리스틴하지만 그 전에, 라인 랩이 네 여정의 중간역이 될 수는 있어.

리스틴네가 원하는 게 새로운 언어든, 새로운 협곡을 만드는 것이든, 아니면 종족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든…… 아무도 간섭하지 않아.

크리스틴 │오히려 라인 랩은 네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줄 거야. 거긴 너 같은 사람이 많아.

내스티 │조건은? 혹은…… 대가는 뭐지?

크리스틴 │내스티,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라인 랩'의 사업을 위대한 일로 여기고, 그걸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아.

크리스틴 │지금까지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하는 거라면, 의심과 상실은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될 거야……

크리스틴 │그러니까, 절대로 멈추지 마.

내스티 │……그렇다면, 라인 랩 가입을 받아들이지.

 

내스티 │우리가 아직 케이블카에 있다는 건,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겠지?

틴맨 │그렇죠?

내스티 │청문회는 반드시 열려야 하고, 모든 일에는 해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라……

내스티 │전 컬럼비아가 알다시피, 2년 전 '프로젝트 호라이즌 아크' 때 크리스틴이 국방부의 투자를 빼돌렸지. 라인 랩 전체가 공범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확실한 공범이었어.

틴맨 │파크 전체를 위협한 중대 과실을 한 회사가 책임지는 것과, 한 개인이 책임지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내스티, 라인 랩을 위해 그 정도 희생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겁니까?

내스티 │희생? 그건 나랑 크리스틴 둘 다 싫어하는 단어야.

내스티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카즈델과 협곡 생활에서 얻은 교훈이지. 나는 메이랜더의 계획에 필요한 희생양이 될 생각은 없어.

틴맨 │……

틴맨 │라인 랩의 다른 사람들까지 곤란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내스티 │그리고 그 '나무'도.

내스티 │장치는 너희 마음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내 보조 연구원이 데이터를 갖고 갈 수 있게 해줘. 연구가 아직 안 끝났어. 걔는 내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는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스티 │다 왔네.

틴맨 │케이블카 승강장의 특수요원이 당신을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 줄 겁니다.

틴맨 │아 참,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난번 카즈델에 갔다가, 협곡에도 들렀습니다만……

내스티 │이미 알고 있어…… 베일라는 여기 있잖아.

내스티 │원래는 청문회 전에 어떻게든 찾을 생각이었는데.

틴맨 │(베일라가 이 파크에……)

틴맨 │(훗, 그렇군요, 머시아……)

틴맨 │제가 사람을 보내 제 오랜 친구를 잘 모시겠습니다.

내스티 │고마워.

 

 

ˇ

파크 내 방송 │이번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서 발생한 돌발 사고에 관한 청문회가 조금 전 종료되었습니다.

파크 내 방송 │용의자 내스티 루노레이는 사이언스 파크의 엔지니어링부 책임자라는 직위를 이용해, 사전에 보고되지 않은 실험 프로젝트를 독단적으로 진행했으며, 이는 하마터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파크 내 방송 │범죄 사실 은폐를 위해, 용의자는 사건 발생 당일 저녁 정체불명의 나무 모양 장치를 이용해, 법을 집행 중이던 파크의 고든 타넨 총장을 공격했습니다.

파크 내 방송 │고든 장관의 말에 따르면, 용의자에게는 상해 혐의 외에도 엔지니어링부의 전시품 정비 권한을 남용한 혐의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파크 내 방송 │용의자는 부하 직원에게 불법 점검을 강제하고, 타 과학기술 기업에 압력을 가해 수십 개의 우수 기업을 파크에서 철수시켰습니다.

파크 내 방송 │현재, 주류, 담배, 아츠 유닛 및 오리지늄 제품 관리국의 지원으로, 무고하게 연루되었던 기업들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로 복귀하였습니다. 이 기업들은 앞으로도 컬럼비아의 하늘 사업을 위해 이바지할 것입니다.

파크 내 방송 │현재, 용의자 내스티 루노레이는 본인의 범죄 사실을 전부 인정하고, 이미 구금된 상태입니다. 향후 특별구 법원으로 송치되어 상응하는 법적 처벌을 받게 될 예정입니다.

파크 내 방송 │향후,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운영은 메이랜더 비상관리 감독 협회의 관리감독 아래, 고든 장관과 구스타브 국장이 맡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파크 내 방송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하늘 생활 전시회'는 정상적으로 진행될 예정입니다.

 

머시아 │베일라 씨…… 시끄러우셨나요? 죄송해요.

베일라 │내스티…… 어떻게 된 거야?

머시아 │……그건 생각하지 마세요, 베일라 씨.

머시아 │내스티 주임에 대한 기억을 어젯밤에 봤던 그대로 남겨주세요.

 

젊은 특수요원은 낡은 슬라이드 프로젝터에 자신의 손을 얹고, 가느다란 실과 기억의 실타래를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회전판을 돌렸다.

메이랜더 비상관리 감독 협회는 정부 기관의 비상관리 조치를 관리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컬럼비아의 모든 사고에 개입해왔다. 사고란 가장 쉽게 조작될 수 있는 사실이니까.

틴맨은 늘 협회의 술수가 마마존스의 메뉴판보다 더 푸짐하다며 비꼬았고, 그 수단에는 당연히 머시아의……

기억을 지우는 오리지늄 아츠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시아는 같은 동작을 백 번, 천 번을 반복했다. 그런데 이 순간, 회전판을 돌리던 머시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머시아 │아니야…… 적어도, 기억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에게 이래서는 안 돼.

머시아 │게다가 오늘은 이미 충분히 많은 사실이 조작됐어.

머시아 │늦어진 청문회, 만족스러워하는 기업 대표들, 군중 속에 숨어든 특수요원들…… 틴맨 선배님의 임무는 대체 무엇일까?

머시아 │순찰 인원은 계속 늘어나고, 제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제가 당신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선배님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예요.

머시아 │정 그렇게 내스티 주임이 걱정되신다면, 제가 방법을 강구해 볼게요……

베일라 │내스티…… 미안하구나, 우리 딸.

머시아 │……

베일라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네가 돌아갈 집이 없어졌어.

 

 

 

ˇ

베일라 │"횃불이 향하는 곳, 영혼들이 모이는 곳."

베일라 │"뼈는 뼈로, 영혼은 영혼으로 돌아가라."

라케라말린 │베일라, 장례식은 이쯤하고 끝내지. 다들 정원으로 돌아갔다. 곧 밤이 온다.

베일라 │3개월, 데모이는 횃대나무 아래의 오두막에서 꼬박 3개월을 버티다, 겨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어.

베일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하지만…… 서서히 빈 껍데기가 되어가는 고통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순 없었어.

베일라 │데모이는 우울한 사람이 아니야. 호숫가의 갈대들도 그녀의 웃음소리에 흔들렸으니까.

베일라 │하지만 지난 200년 동안 즐거웠던 기억은 데모이가 오두막으로 옮겨간 후, 사흘 만에 모두 사라져 버렸어.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 줍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어.

베일라 │그 후로 3개월 동안, 남아 있던 기억들마저 데모이를 저버렸을 때, 데모이는 목구멍에서 뚝뚝 끊기는 듯한 신음 소리밖에 낼 수 없었어.

라케라말린 │그래도 살아있는 200년 동안은 많이 웃었다.

베일라 │그런데 왜 결국 고통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베일라 │지난 200년 동안, 우리가 협곡에 정착한 이후…… 죽어간 모든 밴시들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하나같이 그런 길고 고통스러운 망각을 겪었어.

베일라 │잔인한 농담 같아, 망자에게 밴시는 그들의 존재를 마지막까지 기억해 주는 사람인데. 우리의 본성은 결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인데.

라케라말린 │망각은 지난 200년 동안 새로 생겨난 현상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잘 모르는 질병 때문에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

베일라 │질병일까? 아니면 대가?

베일라 │매번 똑같았어. 그 누가 됐든, 협곡에 관한 기억이 가장 먼저 사라졌지.

베일라 │마치…… 우리가 만들어낸 삶이 애초에 솜과 같은 충전재에 불과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걸로 종족의 본성에서 비롯된 삶의 방식을 대체해 왔지만……

베일라 │시간이 지나 충전재가 썩어 버리면, 그걸로 가득 채워진 존재는 결국 빈 껍데기밖에 남지 않아.

라케라말린 │우리가 원래 하려던 게, 바로 그런 거 아니었나?

라케라말린 │밴시를 위해, 살카즈를 위해, 이전과는 다른 삶…… 전쟁과 죽음이 아닌, 노래와 디저트가 함께하는 삶을 만들어주는 것.

라케라말린 │전하도 우리에게 약속했다. 기억하나? 우리가 협곡에서 이 모든 걸 일구는 동안, 전하는 마왕의 신분으로서 우리 종족을 오랜 원한과 살육의 본성에서 벗어나도록 이끌겠다고.

베일라 │네가 말했잖아, 전하는 마음을 바꿔 오리지늄에서 해답을 구하려 한다고…… 그 '훈작'과 함께.

라케라말린 │그 후에도 전하와 몇 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전하는 우리가 가졌던 이상을 잊은 적이 없다.

라케라말린 │전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결연한 방식을 택한 것뿐이다. 언젠가 전하의 꽃바다가 대지를 뒤덮으면…… 살카즈에게도 새로운 삶이 필요할 거다.

베일라 │협곡이 그때까지 버텨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베일라 │횃대나무가 시들어가고 있어. 뿌리는 이미 썩기 시작했고. 토석의 아이의 주술도, 나의 주문도 소용이 없어.

라케라말린 │횃대나무에 대한 건,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나는 그저 그대가…… 그 미래를 계속 보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라케라말린 │지난 3개월 동안, 데모이 곁에 있어 주느라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쉬었던 적이 있었나?

라케라말린 │적어도 그녀는 그대의 주문으로, 안개 호수의 물소리와 노 젓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라케라말린 │하지만 그대는?

베일라 │데모이가 떠나고, 200년 전 그 전쟁을 겪은 밴시는 이제 우리 둘뿐이야.

베일라 │그 대가는, 내가 짊어질 수밖에 없지.

라케라말린 │그럼 아이들은?

베일라 │그래서 아이파닐을 카즈델로 보낸 건가?

라케라말린 │밴시의 미래는 언젠가 아이들에게 맡겨야 하니까.

베일라 │우리의 결정이 옳든 그르든,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선 안 돼.

라케라말린 │……그래서 내스티를 장례식에 부르지 않았나?

베일라 │안 부르길 잘했지. 만약 협곡의 삶이 충전재나 다름없는 취약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다면……

베일라 │내스티처럼 카즈델에서 자란 아이에게, 죽음은 그저 바닥에 잔뜩 자라난 오리지늄 결정 군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베일라 │죽음을 대하는 그 아이의 태도는 분명 다른 아이들의 의심을 살 거야.

라케라말린 │내스티는 똑똑한 아이다. 그대의 의도를 모를 리 없다.

라케라말린 │예전에, 내스티는 자신의 오두막을 횃대나무 옆에 짓고 싶어 했지만, 그대는 무심과 산림에 짓게 했지.

라케라말린 │그대는 종족들이 모이는 정원에 그 아이를 거의 데려오지 않았고, 주문과 엘레지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스티에게 뭐라고 해명했지?

베일라 │아이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집사'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사는 거라고. 내가 바쁘게 지내는 걸 그 아이도 다 봤으니까……

라케라말린 │내스티가 믿었나?

베일라 │적어도 더 묻진 않더군.

라케라말린 │……

베일라 │자, 라케라말린, 이만 돌아가.

라케라말린 │그대는?

베일라 │난, 여기에 조금 더 있고 싶어.

라케라말린 │엘레지라면 충분히 불렀다.

베일라 │그냥…… 이제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곘어. 협곡은 썩어 가는 중이고, 협곡 밖에서는 내 잘못으로 돌아갈 곳을 잃은 영혼들이 지금도 흐느끼고 있어.

라케라말린 │적어도, 돌아가서 내스티 곁에 있어 줄 수는 있다.

라케라말린 │우리는 어머니 된 자, 아이를 문밖으로 밀어내는 대가를 감당할 수 있진 않을 거다.

라케라말린 │그대는 잔인한 진실을 격리하기 위해 그 문을 닫은 거겠지만, 아이는 엄마가 자기를 밀어내고 있다고 느낄 거다……

베일라 │……

베일라 │요 며칠, 내스티가 떠날 거란 예감이 없었던 건 아니야……

 

단지,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뿐.

 

내스티 │확실히 갑작스러운 결정이긴 해.

내스티 │……

베일라 │……

 

가냘픈 쪽배 한 척이 물길을 타고 흘러갔다. 연로한 밴시는 주문으로 협곡 밖을 향해 배를 움직이고 있었다.

갈대가 흔들리고, 옅은 안개가 호수 위의 낙엽을 덮었다. 계절을 알 수 없기에 이 이별의 분위기를 정의할 길이 없었다.

 

베일라 │네가 협곡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바랐는데.

베일라 │너를 더 일찍 찾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 때문에 네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어.

베일라 │너를 협곡에 데려오기로 헀을 때, 내가 책임을 져야 했지만, 결국……

베일라 │내 모순을 용서해 줘, 내스티.

내스티 │내가 떠나는 건 당신 때문이 아니야, 베일라.

내스티 │……적어도 당신이 생각하는 이유는 아니야.

베일라 │그 아이들과는 달리, 너는 카즈델이 여전하다는 걸 잘 알잖니……

내스티 │산 사람은 여전히 녹과 분뇨 냄새가 진동하는 장터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죽은 사람은 몸에서 결정이 잡초처럼 돋아나는……

내스티 │그런 곳에는 내가 찾는 답이 없어.

베일라 │그렇다면 네가 찾는 답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

내스티 │……

베일라 │그, 그럼 어디로 갈 생각이야?

내스티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당신에게서 몰래 훔쳐 배운 서툰 주문으로 협곡 입구에서 돌멩이 몇 개를 던져, 그것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가버릴지도 몰라.

내스티 │라이타니엔? 라테라노? 컬럼비아?

내스티 │카즈델에서 떠돌아다닐 때, 그 낯선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어.

베일라 │그곳은……

베일라 │아주아주 먼 곳인데……

내스티 │그게 왜?

베일라 │……

베일라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어, 우리 딸.

 

긴 침묵 후 베일라가 내뱉은 말은 겨우 그뿐이었다.

연로한 밴시는 죽음을 알리는 여정을 수천수만 리 넘게 걸어왔지만, 문득 그 지명이 자신에게도 똑같이 낯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멀리 떠나는 양녀는 곧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 여정의 종착지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무슨 당부를 해야 할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저 배가 흘러가며 나는 물소리만 잔잔히 이어질 뿐이었다. 내스티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스티 │안녕…… 어머니.

 

 

작전 후

 

파크 내 방송 │각 회사 대표님들과 테스터 여러분께 안내 말씀을 드립니다.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2시간 뒤에 특별구와 연결될 예정입니다.

파크 내 방송 │도시 간 네트워크의 범위 안으로 진입하면, 파크의 생방송이 자동으로 시작됩니다. 참가자 여러분께서는 전시품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늘 생활 전시회'가 곧 막을 올립니다!

오클리 │저기 봐! 타워마운틴 바이오의 린수 비행선이야! 마지막에 손을 많이 봐서 소재의 내열성이 굉장히 향상했대.

오클리 │그리고 태양광 부유 주방 세트도 있어! 별깍지 밖에서도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던데, 홍보자료를 보면서 얼마나 궁금했는지…… 으악!

펀 │난간에 부딪히기만 해서 다행이야. 머리가 창문에 끼진 않았어.

오클리 │곧 전시회 시작인데, 안 초조해?

펀 │걱정하지 마. 이 전문가님께서 완벽한 탈옥 계획을 세워뒀다고. 때가 되면 널 데리고 도망쳐 줄게.

??? │그렇게 나가고 싶나?

오클리 │아, 아니요…… 저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사이언스 파크 경비 │됐어. 나는 너희들에게 물건을 가져다주러 온 것뿐이야.

펀 │……

오클리 │엄청 두껍네. 이건 조서랑 승인서? 문책 대상자가…… 펀 반?

펀 │공공기물 훼손, 문화재 절도, 금지구역 무단 침입, 해설원 사칭…… 겨우 가이드 하나 상대하겠다고 5년 경력을 통째로 뒤진 거야?

사이언스 파크 경비 │서명만 끝나면 너는 남은 생을 감옥에서 수갑과 족쇄나 설명하여 살아야 할 거다.

펀 │너희가 원하는 게 뭔데?

사이언스 파크 경비 │전시회가 곧 시작인데 방송 스튜디오의 일손이 모자라. 파크에 단 두 명뿐인 해설원을 계속 가둬 둘 순 없잖아. 재능을 썩히기도 아깝고, 후속 진행에 영향줄 수도 있으니.

사이언스 파크 경비 │하지만, 넌 전과가 너무 많고 내스티와도 연루되어 있어.

펀 │그래서 날 협박하는 거야?

사이언스 파크 경비 │네가 주제 파악만 잘하면, 이번에 그 죄명을 모두 지울 수 있어.

펀 │아무래도 선택권은 없는 것 같네.

사이언스 파크 경비 │구스타브 국장님께 감사해. 그분이 메이랜더 비상관리 감독 협회에 제안하신 덕분에, 너희가 이 획기적인 전시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거니까.

사이언스 파크 경비 │안내 방송은 들었겠지? 이 파크가 생방송에 필요한 도시 간 네트워크 범위에 진입하기 전에, 무조건 모든 컬럼비아인에게 미래를 소개할 준비를 마쳐야 한다.

펀 │알았어. 스튜디오 일을 다 끝내고, 전시회가 끝나기 전까지 파크를 떠나지 않을게.

사이언스 파크 경비 │좋아.

사이언스 파크 경비 │둘 다 따라와, 일할 시간이다.

 

 

ˇ

잭슨 │"라이타니엔 전 국민을 대표하여, '프로펠러 파라다이스' 사이언스 파크의 '하늘 생활 전시회' 개최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잭슨 │서명은?

??? │귈데네스게사츠의 수석 연주자, 아홉 구역의 수호자…… 아무튼, 우리가 모르는 타이틀을 줄줄이 보유한……

??? │여황 본인이군요.

잭슨 │메이랜더 셀레네 씨가 생전에 말한, 예민한 정치적 후각은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봅니다.

잭슨 │야라 씨.

 

야라 │가능하다면 저는 와인에 예민한 후각을 평생 갖고 싶네요.

잭슨 │라테라노에서 반세기 동안이나 준비한 '만국 정상회담'이 테라에서 최근 200년 동안 열린 외교 행사 중 가장 큰 규모였음에도, 라이타니엔에서는 별 볼 일 없는 공작 몇 명만 참석했었죠.

잭슨 │그런데 고작 이 '하늘 생활 전시회'를 위해서 여황이 친필 축전까지 보내다니……

부통령 비서 │부통령님,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서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대통령님을 모델로 특별 제작한 풍선 세트인데, 대부분은 우선 복도에 장식해 두었습니다.

잭슨 │고마워, 파바르.

야라 │여황께 그 풍선을 답례로 보내는 건 어떠십니까?

잭슨 │게사츠슈베이터와 고탑 캐스터들이 그 풍선을 사흘 동안 가루가 되도록 찢게 할 생각인가요?

야라 │그냥 평범한 풍선일 뿐인데요.

잭슨 │여황이 친필 축전을 보낸 순간부터는 아닙니다. 풍선은 최첨단 군사기술의 산물로 '변신'할 겁니다. 풍선으로 위장해 타국 영공에 진입하는 항공 폭탄으로 말이죠.

야라 │그런 축전을 몇 통이나 받으셨습니까?

잭슨 │빅토리아 대공작, 우르수스 의장, 카시미어 대기사장…… 손가락으로 다 꼽기 어렵군요.

잭슨 │전임 부통령께선 4년 동안 국경의 이민자들과 관세 정책 때문에 고심하셨는데, 저는 이 4년 동안 무슨 일로 고민했던 걸까요?

잭슨 │난공불락의 도시가 점령됐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하늘이 갈라졌으며, 오랫동안 침묵하던 바다까지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잭슨 │그 일들이 있고 난 뒤, 핵심권의 모든 국가가 약속이나 한 듯 "풍선은 없다. 오로지 항공 폭탄뿐이다." 라는 프레임으로 들어가 버렸죠.

잭슨 │하지만 우리는 어떻죠?

잭슨 │아, 우리의 이 풍선은 심지어 날아오르지도 못하죠.

부통령 비서 │풍선이 도착하기 전, 풍선 안에 있던 인화성 수소를 공기로 바꿨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요.

잭슨 │정말 안전하지 않나요, 이 컬럼비아는.

야라 │들어보니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인 듯한데, 그런데 굳이 저같이 은퇴한 노파에게 그런 말을 꺼내시다니……

야라 │그것도, 특별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응접실이 있는 스테이트 빌딩에서 말이죠.

잭슨 │은퇴했다고 해서, 야라 부커 윌슨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잭슨 │영원한 밤을 불태우던 '모닝 스타'에게도, 라인 랩의 전 인적자원조사과 주임에게도 이걸 제대로 된 대접이라 하긴 어렵죠.

잭슨 │요즘 시대에는 어떤 정치적 견해나 약속보다는, 전설이나 기적 같은 것에 사람들의 마음이 더 동요하는 것 같습니다.

잭슨 │우리의 가장 이성적인 의원조차 마찬가지고요.

야라 │만약 제가 웨인 의원과 몇 번 만났던 것에 관한 거라면, 부통령님께선 이미 제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셨습니다…… 쉐라그에서 돌아오실 때 가져온 특별한 기념품들로요.

잭슨 │그건 사적으로 감사를 표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관측소에 주둔 중인 라인 랩 과학자들이 진작 같은 기념품을 보냈을 것 같더군요.

잭슨 │만약 야라 씨가 나서서, 적임자에게 컬럼비아 풍선 속의 공기를 다시 수소로 바꿀 기회를 준다면, 당신에게 감사이 뜻을 표할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야라 │제 상식으로, 풍선의 공기를 바꾸는 일도 '적임자'를 따져야 한다면, 그건 풍선을 만든 사람밖엔 없을 것 같군요.

야라 │그들을 위해서라면, 저는 이미 여러 번 나섰습니다.

야라 │과학자들은 늘 아이처럼 순수하고 진지하죠. 그래서 저도 항상 그들의 희망이 무너지는 걸 보는 게 가장 힘듭니다.

야라 │이점은 부통령님의 말씀이 맞네요. 은퇴했다고 제가 변하지는 않더군요.

잭슨 │……물론, 야라 씨에게 라인 랩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야라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보세요…… 망원경이 없어도 보일 정도입니다.

야라 │저들이 컬럼비아의 풍선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 놓을지, 우리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ˇ

테스터 │자, 구경들 해보세요! 대통령 모양의 고공 자가 적응 풍선입니다.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인기 굿즈랍니다!

테스터 │풍선의 얇은 막은 외부 환경에 따라 자동으로 소재의 분자 구조를 조정합니다. 따라서 차단층에 부딪혀도 절대 터지지 않습니다.

테스터 │아가씨,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터지지 않는다면, 차단층 아래에 얼마나 많은 풍선이 쌓이게 될까요?

머시아 │……

머시아 │제가 알기로는, 특수요원 평가에 대학의 기초 물리학 합격 요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테스터? │이 파크의 존재 의미가 물리학의 경계를 뛰어넘는 데 있지 않습니까?

머시아 │그러니까, 당신이 들고 다니는 그 크고 작은 샘플이랑 간식이 다 학술 연구용이란 말입니까?

테스터? │(와그작 씹는 소리)

테스터? │위장일 뿐이죠. 이따가 4번 플랫폼에 가서 갓 나온 행성 솜사탕을 살 거예요…… 작은 진공 상자 하나로 테라의 탄생 과정을 재현할 수 있다니.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테스터? │적어도 특별 대상을 이동시키는 일보다는 재미있겠죠.

머시아 │특별 대상이라면…… 그 밴시를 말하는 건가요?

테스터? │맞습니다. 당신이 담당했던 그분이요.

머시아 │역시, 틴맨 선배님은 알고 있었군요……

테스터? │선배님께서 당신에게 급한 임무가 생기는 바람에, 우리가 특별 대상을 철수시키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머시아 │베일라 씨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세심하게 대해주세요.

테스터? │연로한 밴시라 주술에 아주 능할 테니, 차질이 생기지 않게 인지 교란 장치를 설치할 생각입니다.

머시아 │인지 교란? 그분은 이미 산산조각 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계세요!

테스터? │그나저나, 저랑 같이 작전을 수행할 동기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걸까요. 모든 특수요원은 반드시 30분 안에 파크 내 인원을 부유 구조층에서 철수시켜야 하는데. 더 늦으면 기념품을 못 사거든요.

테스터? │어쨌든 이런 기괴하고 재미있는 것들을 다시 보긴 힘들 테니까요.

머시아 │……

머시아 │일단 사려던 행성 솜사탕을 사러 가세요. 당신의 동기는 오지 않을 거예요.

테스터? │그게 무슨? 제가……

테스터? │내가…… 왜 케이블카 승강장에 있지?

테스터? │맞다, 4번 플랫폼에 가야 해. 이러다가 마지막 솜사탕을 놓치겠어.

ˇ

머시아 │……

머시아 │베일라 씨, 죄송해요. 제가 벌어드릴 수 있는 시간은 30분뿐이에요.

머시아 │가서 소원을 이루세요. 당신은 이제 자유입니다.

 

 

ˇ

베일라 │……

베일라 │문이, 열렸네.

베일라 │집으로…… 인도하는 길인가?

베일라 │……그런데, 내스티는…… 어디에……

 

 

ˇ

고든 │파크 생방송 시작까지 1시간 남았어. 어떤 넥타이가 좋을까……

고든 │쯧, 구스타브는 아직도 개막 연설자를 못 정한 거야? 더 시간 끌면 연설문을 준비할 시간이 없는데!

고든 │내가 파크에 기여한 게 얼만데. 1시간으론 부족하다고. 감사를 전할 기관과 부서만 해도 백 곳이 넘어. 그렇게 많은 일을 도와줬는데, 언급은 해줘야지……

고든 │설마 예상치 못한 사고 같은 건 일어나지 않겠지……?

고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늙은이가 아무리 나랑 안 맞아도, 고작 며칠밖에 알지 못한 쿠란타를 편애할 정도는 아니겠지.

고든 │하아, 구스타브 그 인간은 끝까지 여전하구먼. 자기 말을 '잘 듣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써가면서 부하들을 안달 나게 만들다니.

고든 │우리도 참 애들 같았지. 그 당연한 보상에 마음을 졸였으니까.

고든 │……054는 왜 여태 안 오는 거지? 그냥 사무실에 가서 소식 있는지만 알아보라고 했는데?

고든 │누구냐!

고든 │……편지?

고든 │역시…… 이럴 줄 알았어!

고든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연설 기회는 내게 줬군, 그래 이게 당연한 거지!

고든 │내가 보직을 옮기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행정부의 가장 존재감 없는 직원에서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했는데?

고든 │나야말로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총장이야. 오직 나에게만 이 파크에 이름 붙일 자격이 있다고!

고든 │오호, 구스타브가 개막식 연설 원고까지 준비해 줬네? 늙은 여우, 일 하나는 정말 철저하다니까.

고든 │"컬럼비아 국민 여러분,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총장을 맡은 고든 타넨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시간을 오래 기다리셨을 겁니다."

고든 │"이 자리에서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마음으로, '하늘 생활 전시회'의 취소를 공식 선언합니다. 파크에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고, 저는 책임자로서 이 사태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을……"

고든 │잠깐, 사고?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이건……

고든 │공개 사과문?

우주 린수 │경보! 경보!

우주 린수 │순찰 종료, 편지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일부 도로가 테라인들에 의해 봉쇄되었습니다. 진행 경로 예측 결과, 그들은 부유층의 실험 구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주 린수 │동시에, 다수의 고에너지 오리지늄 제품의 이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제품 위의 식별 태그는…… 고든 타넨 소유입니다.

고든 │내 거라고……?

 

사과문, 054가 가져온 소식…… 이건 장난 같은 예언이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충격, 공포, 그리고 분노…… 수많은 감정이 고든의 가슴에 차올랐다.

구스타브가 사고를 일으키려는 걸까?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서, 온 컬럼비아인이 고대하는 전시회에서?

무슨 이유로? 언제부터 계획한 거지? 이 판국에, '고든 타넨'은 또 어떤 체스말로 쓰인 걸까?

고든에게 '사과'와 '사죄'같은 단어들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동료들의 따돌림과 자신의 유별난 취향으로 인해 고든은 언제나 '규정 위반' 중이었으니까.

눈앞의 이 얇은 원고, 여기엔 그가 보냈던 7년이란 세월의 총합이 들어 있었다.

관리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고든은 수백 장의 경위서를 썼다. 그는 구스타브가 자신에게 사죄를 강요하던 모든 순간을 기억했고, 처음에는 반발하던 자신이 어떻게 타협하게 됐는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마땅히 얻어야 하는 보수도,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구스타브에게 졸랐던 것도 늘 죄목뿐이었다.

 

구스타브 │『고든 장관, 연설문은 받았나?』

구스타브 │『어떤가, 할 수 있겠나?』

고든 │……

 

고심해서 고른 넥타이가 마치 형벌 도구마냥 더 고든의 목을 조여왔다.

 

고든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말을 듣는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