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비스트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부리를 다듬고 있었다. 녀석이 문득 고개를 돌려 대지를 내려다보자, 마침 대지에서도 누군가 녀석을 보고 있는 듯했다.
작전 전
베테랑 특수요원 │상황 보고해.
특수요원 │부유층의 모든 캡슐을 폭파망에 연결했습니다. 하층부의 인원들은 광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중입니다.
특수요원 │지금 전시회를 향한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워서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특수요원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특별구와 연결되기만 하면, 부유층 전체를 폭파할 수 있습니다.
베테랑 특수요원 │라인 랩 쪽 움직임은?
특수요원 │현재 관련 인원 23명을 체포했고, 10여 명은 부유 플랫폼에서 흩어져 도망 다니고 있습니다.
특수요원 │현재 고지 8곳을 이미 점령했습니다만, 이들은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 사이만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일반 점검 도구 외에 라인 랩에서 만든 특수 장비는 소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테랑 특수요원 │이대로 숨바꼭질만 하겠다?
베테랑 특수요원 │계속 지켜보고 있어. 메이랜더의 세부 계획도 모르고, 연락 수단도 없는 상태야. 막판에 반격하려 해도 소용없을 거야.
특수요원 │네.
케이블카 승강장 대기 구역에서 밖을 바라보니, 맥스 특별구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컬럼비아의 가장 번화한 이동도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파크에 진입한 뒤로, 특수요원들은 단 한 번도 이곳의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맑은 시야 덕분에, 부유층의 기묘하고 정교한 시설들이 온통 살아 숨 쉬는 듯 보였다.
부유 캡슐은 마치 수생 생물처럼 유유히 떠다녔고, 부유 플랜터 유닛은 질서정연하게 각종 소형 플랫폼 사이에 배치되어 에너지 공급망 형성체, 부유층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베테랑 특수요원 │잠깐…… 방금 라인 랩 사람들이 어디에 나타났다고 했지?
특수요원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입니다.
베테랑 특수요원 │정확한 위치를 보여줘.
베테랑 특수요원 │이동 동선을 통합해 보면, 라인 랩의 그 '나무' 플랫폼에 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다른 회사의 부유 캡슐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베테랑 특수요원 │설마 애초부터 자기들의 구역을 되찾으려던 게 아니었나?!
베테랑 특수요원 │하지만 라인 랩이 됐든, 그 테스터들이나 회사 대표가 됐든, 다들 그냥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뿐인데……
베테랑 특수요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특수요원은 가까이에 있는 플랜터 유닛을 흘끗 쳐다보았다. 눈에 띄지 않는 라인 랩의 구조물이 조용히 그곳에 있었다.
특수요원은 그제야 작은 장치의 가장자리에 있는 충돌 방지등이 대낮에도 아주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과, 꽤 오랫동안 불규칙적으로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특수요원 │정찰 요원 말로는, 라인 랩 사람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베테랑 특수요원 │아니야, 사라진 게 아니야!
베테랑 특수요원 │모두 같은 곳으로 이동했어…… 녀석들의 행동에는 규칙이 있었어!
베테랑 특수요원 │다들 잘 들어. 길에 보이는 모든 플랜터 유닛을 파괴해! 라인 랩의 그 장치는 그냥 장식품이 아니다! 놈들이 그걸 통신 장치로 쓰고 있어!
베테랑 특수요원 │전시 구역과 케이블카 승강장 사이의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우리와 숨바꼭질하는 모든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그들의 목적지를 밝혀내라!
베테랑 특수요원 │대체 뭘 하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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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펜 │펀 씨,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보고 계시네요.
펀 │너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애스펜 │네, 맞습니다.
펀 │나도 지금 내기를 하는 중이야.
애스펜 │당신의 태도와 조금 전의 자유 낙하로, 파크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애스펜 │당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와 함께 이런 위험을 무릅쓰진 않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당신과 거래할 만한 게 없습니다. 딱 하나 있다면……
펀 │음……
애스펜 │설마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원하시나요?
펀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펀 │내가 원하는 건 고든 타넨이 너에게 판 금지품이야.
펀 │연설 준비는 안 하고 스튜디오에 와서 날 귀찮게 하는 거야? 낯짝 참 두껍네, 고든 장관.
고든 │나랑 틀어진 모든 사람들이 협력의 가능성을 거절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펀 │협력? 그건 무리야.
펀 │메이랜더가 내가 이 업계에 들어온 이후 저지른 온갖 위법 기록을 긁어모았어. 물론, 나도 내 남은 인생을 콩밥 품평이나 하면서 살고 싶진 않아.
고든 │너는 얌전히 있을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내가 제안할 협력은 바로 메이랜더와 관련이 있어.
고든 │이곳은 파크의 동향을 살피기에 가장 좋은 곳이야. 오클리는 한창 들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쳐도, 네가 그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펀 │굳이 말하자면……
펀 │부유층의 생방송 화면이 너무 자주 전환돼. 설비 테스트라는 말은 핑계인 것 같고. 광장에 처음 보는 테스터들만 최소 10명이 있는데, 구경보다는 순찰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여.
고든 │마치 위험이 곧 닥칠 걸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펀 │또 나를 속여 음모에 가담시킬 생각이야?
고든 │이 파크는 곧 예정된 사고를 당할 거다. 이건 사실이야. 구스타브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천만 컬럼비아인들의 농담거리로 만드는 걸 내가 두고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고.
고든 │10초 줄게. 할지 말지, 결정해.
펀 │성공 확률은?
고든 │10%.
펀 │네가 할만한 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고든 │상대가 그 교활한 여우라면, 난 무조건 걸 수밖에 없어.
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라…… 재밌네, 계획을 말해봐.
고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해 부유층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이 목록에 있는 오리지늄 제품과 아츠 유닛을 회수해.
펀 │이게…… 전부 네가 거래한 금지품이야?
고든 │이것들의 잠재력은 전시품의 심장 역할에 그치지 않아.
펀 │너 설마……
고든 │파크를 통째로 데리고, 도망치는 거야.
펀 │구스타브와 메이랜더는 처음부터 이 전시회를 제대로 진행할 생각이 없었구나, 개막식은 그냥 겉치레였어.
펀 │부유층에 곧 2번째 추락이 찾아올 거야. 그리고 하루에 기적이 2번씩이나 일어나는 일은 없겠지.
애스펜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다시 운영할 자본은 없는 건가……
펀 │그건 파크 내에 있는 대부분의 신생 과학기술 기업들도 마찬가지야.
애스펜 │"파크를 통째로 데리고, 도망치는 거야."……
펀 │이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보전하고, 하층에 있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펀 │파크는 황무지에서 7일째 운행하고 있고, 연료도 얼마 남지 않았어. 섹터도 이미 보호 모드로 전환됐고, 기초 동력 모듈만으로는 방향을 바꿀 순 없어.
애스펜 │하지만 '럭키 치스티비스트'가 거래한 아츠 유닛은 그냥 에너지 전환을 위한 안정기일 뿐이에요. 섹터 방향을 바꿀 만큼의 동력은 제공하지 못할 텐데?
펀 │맞아.
펀 │하지만 고든이 밀수한 아츠 유닛과 오리지늄 제품은 그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애스펜 │그러니까, 모든 아츠 장치 금지품을 회수하고, 이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동력 모듈을 만들어 섹터의 방향을 틀겠다고요?
펀 │방향을 트는 게 아니라, 유턴이야.
애스펜 │유턴이라니…… 펀 씨,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요? 그쪽은 국경이라고요!
펀 │해외여행 절차는 확실히 복잡하긴 하지.
애스펜 │그건 반역이나 다름없잖아요!
애스펜 │싫어요, 전 감옥에 못 가요. '럭키 치스티비스트'를 생방송에 내보내야 해요. 북노스빌에 있는 아내가 볼 수 있게……
펀 │고객 제일의 원칙 때문에 미리 알려주는 건데, 우리의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럭키 치스티비스트'는 생방송에 출연하지 않을 거야.
애스펜 │설마……
펀 │미안하지만, 설령 너를 설득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부품을 가져갈 거야. 시간이 얼마 없어.
애스펜 │애초에 우리는 이 부유 캡슐을 떠날 수 없어요……
펀 │중앙 잠금장치를 열어준 사람이 있어.
애스펜 │네?
펀 │창밖에 떠 있는 부유 플랜터 유닛이 보여? 충돌 방지등이 3번 연속 깜빡였어. 저건 구조 신호야. 등불이 5초 동안 켜졌다가, 현재의 신호를 반복하지.
펀 │그리고 이제…… 3, 4, 5…… 7번 깜빡였어.
펀 │목록에 있는 다른 부품들은 전부 회수된 모양이야. 이제 다들 7번 부유 플랫폼으로 모이면 돼. 잠깐……
펀 │……충돌 방지등이 꺼졌어?
애스펜 │꺼지다니요? 그건 또 무슨 뜻이죠?
펀 │메이랜더가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챘어, 위험해.
애스펜 │……
펀 │애스펜, 나랑 같이 가. 안 그러면 내가 기절시켜서라도 끌고 갈 거야.
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애초에 선택권 같은 게 없었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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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앉게.
고든 │……
구스타브는 7년 동안이나 자신과 맞선 사브라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의자에 앉아 쭈뼛거리는 모습이 꼭 은박지에 싸인 감자 같았다.
구스타브는 이런 젊은 관료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를 품고 있고, 나대길 좋아하며, 규칙은 자신을 옭아맨다고 생각해 모든 것에 불만을 품는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똑같은 의자에 앉게 된다. 젊음이라는 등뼈가 의자 등받이에 교정되고 나면 그들도 정식으로 컬럼비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다.
마치 고든 타넨처럼.
구스타브 │좋아, 메이랜더의 계획이 성공하면 스튜디오는 화면을 공중 레스토랑으로 전환할 걸세. 실수하지 말도록.
구스타브 │평소에 잘난 체 하던 태도는 버려. 말투는 간절하고 비통해야 하고. 자네가 직접 세운 파크이니 감정을 잡는 건 어렵지 않겠지.
구스타브 │자네의 그 슬픈 표정은 컬럼비아 주요 신문 1면을 장식할 텐데,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여야지. 안 그래?
고든 │……
구스타브 │그 장난감 괴물은 그만 보고.
구스타브 │나도 알아. 자네도 내스티처럼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또 다른 죄인이 되고 싶진 않겠지.
구스타브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네가 즉흥적으로 조립한 장식품이 자네를 변호해 줄 리가 없잖아.
고든 │그래서, 제가 지금 고든 타넨의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겁니까?
구스타브 │그래.
고든 │연설문대로 사죄하고 나면, 저도 국장님과 함께 국방부에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구스타브 │내 말만 잘 들으면, 자넨 탄탄대로를 걷게 될 거야.
고든 │하지만 그런 견 별로 흥미가 없는데.
구스타브 │뭐라고?
고든 │이 의자, 내가 앉기에는 너무 너무 불편하니까.
통신음 │『……생방송 카운트 다운 시작합니다. 공중 레스토랑, 스탠바이……』
구스타브 │생방송? 지금?
구스타브 │그럴 리가…. 부유층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는데, 메이랜더가 실수한 건가?
구스타브 │대체 누가 스튜디오를 통제하고 있는 거냐!
통신음 │『셋, 둘, 하나!』
고든 │054, 지금이다.
우주 린수 │네!
구스타브 │뭐야?
구스타브 │으윽!
생방송 화면이 공중 레스토랑으로 전환된 순간, 우주 린수 054는 무방비 상태였던 구스타브를 덮쳐 그를 제압했다.

레스토랑 내부의 스크린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구스타브는 거기서 고통과 공포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얼굴이 파크의 모든 화면에 송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몇 가지 대비책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메이랜더의 계획이 이미 최종 단계에 진입한 뒤였고, 그에게는 정신을 딴 곳에 팔 여유가 없었다. 인원을 소집하는 데 쓰는 통신기는 어느새 우주 린수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고든은 스트레칭하듯 목과 손목을 쭉 펴더니, '피고인석'을 발로 차버리고는 옆에 있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고든 │아, 역시 이게 편하다니까……
고든 │어이, 당신의 그 슬픈 표정은 컬럼비아 주요 신문 1면을 장식할 텐데, 최대한 그럴듯하게 보여야지. 안 그래?
구스타브 │자네……
고든 │왜? "'하늘 열풍'에 휩쓸려 만든 사소한 취미"에 당할 줄은 생각도 못헀나 봐?
고든 │당신은 관리국의 공신이었고, 지금은 국방부의 재임용을 받으려 하고 있지. 젊었을 땐 컬럼비아를 위해 규칙을 만들고, 은퇴 후에도 '나라에 충성을 다하겠다'니……
고든 │이야, 정말 대단하군.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당신은 모든 적의 반항 수단이 규칙을 이용한, 그런 똑똑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고든 │하지만 이 고든 타넨은 규칙을 무시하는 건달에다, 이상도 포부도 없는 쓰레기라고. 혹시 잊었나?
고든 │하긴, 그럴 만도 하지. 054의 정체도 못 알아챘으니까. 심지어 음성 모듈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우주 린수 │안녕하세요, 주류, 담배, 아츠 유닛 및 오리지늄 제품 관리국 지부입니다. 처리 현황 조회는 1번, 안전사고 신고는 2번, 상담원 연결은 0번……
구스타브 │……관리국 자동 응답기?
고든 │말했잖아, 우주 린수는 부자들의 시가가 아니라고. 나도 이 녀석이 내가 만든 규칙을 따른다고 우쭐해 하진 않아.
고든 │7년 전의 어느 깊은 밤, 나는 오래 앉으면 엉덩이가 아픈 의자에 앉아 첫 번째 경위서를 쓰면서, 그만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고든 │그때 054의 자동 응답기가 울렸고, 특이한 잡음이 들렸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나는 머리를 쥐어짰어.
고든 │그 뒤로, 나는 내 손을 거쳐 간 모든 아츠 유닛과 오리지늄 제품을 연구했어. 054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응답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주려고.
고든 │그 수백 장의 경위서를 내가 굴복했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054는 이 고든 타넨이 관리국에서 보낸 7년이라는 시간의 결정체다!
구스타브 │황당하군. 발명이나 하려고 관료 사회의 온갖 처세술을 익히지는 않을 텐데!
구스타브 │자네가 협상하는 모습이나 남을 위협하는 모습을 내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나? 오만하고, 허영심 많고, 야심이 가득하지……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어.
구스타브 │지금도 자네 말투에서 내가 연설할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고든 │……나는 내가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고든 │어쩌면 당신에게서 배운 나쁜 버릇을 평생 고칠 수 없을지도 몰라. 기분은 더럽긴 한데, 잘못은 아니니까.
고든 │나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내가 스스로 거래를 '밀수'라 정의하고, 은연중에 이미 굳어버린 불합리한 규칙을 받아들였다는 거야.
구스타브 │어리석은 녀석. 아직도 이 판의 이해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고든 │잘 들어, 노친네!
고든 │당신이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대도,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는 전쟁의 온상이 되어서는 안 돼.
고든 │동력 엔진과 고에너지 아츠 유닛을 이용하면, 확실히 무기를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놈들이 지탱하고 있는 건 사람들의 하늘 생활에 대한 동경이야.
고든 │특별구와 연결되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장관이자, 아직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낙원의 창설자야……
고든 │이곳을 괴멸하게 할지 도망가게 할지는, 내가 결정해.
고든 │054, 구스타브 몸에 있는 권한 패스를 가져와.
우주 린수 │네.
구스타브 │소용없다, 중앙 통제실은 이미 봉쇄됐어. 내 권한 패스가 있다 해도 이 섹터를 멈출 수는 없다. 파크와 특별구의 연결도 막을 수 없지.
고든 │내가 멈춘다고 했나?
구스타브 │그게 무슨……
고든 │말했잖아, '도망'이라고.
고든 │전임 관리국 국장은 은퇴 후에도 높은 보안 등급의 권한 패스를 말소하지 않고, 그걸 이용해 멋대로 컬럼비아 국경의 이동도시 식별 코드 감시 시스템을 차단……
고든 │재미있지?
구스타브 │자네 정말…… 이 유치하고 쓸모없는 '어린이 공원' 때문에 나라를 배신하는 중죄를 저지르려는 건가?
구스타브 │하하하, 자네 말이 맞아. 확실히 자네는 내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어.
구스타브 │한가지 짚어주자면, 파크의 연료가 곧 바닥나. 자네는 섹터의 주행 시스템을 통제할 수 없고, 충분한 에너지도 없어.
고든 │내가 개조한 로봇에 제압당해 바닥에 엎드려 꿈쩍도 못 하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내가 발명가라는 사실을 잊었나 보네.
고든 │내가 부탁한 걸 제 시간에 가져다줬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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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펠러 파라다이스' 사이언스 파크, 7번 부유 플랫폼
로터리 엔진의 굉음이 이토록 또렷했던 적은 없었다.
하늘은 맑았고, 지나치게 반질반질한 자가 세척 인공 구름 생성기와 높이 떠 있는 구름이 기묘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지만, 부유 플랫폼의 사람들은 그 광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근 50명의 사이언스 파크 경비원과 메이랜더 특수요원들이 각 통로와 플렉스 와이어가 연결된 부분을 지키며, 몸과 무기로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만들었다.
발밑의 복고풍 흑백 타일은 마치 체스판처럼,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야외 통로를 경계로 양측을 갈라놓았다.
특수요원들은 좁은 통로 건너편의 서브 플랫폼을 예의주시했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라인 랩 직원들과 테스터들이 그곳에 모이고 있었다.
특수요원 A │7번 플랫폼…… 분석이 맞았어, 숨어있던 무리가 다 여기에 모였다.
특수요원 A │우리 쪽 배치는 끝났다. 그런데 상대 쪽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
특수요원 B │스튜디오에 심어둔 우리 인원이 제압당했어, 전에 받은 데이터는 신뢰할 수 없다.
특수요원 B │현재 가능한 인원을 모두 대동한 상태야.
특수요원 A │수적 우위는 아무 의미 없어, 경계를 강화해라. 저들은 파크의 신식 무기와 통로에 대해 아주 잘 알지만, 우린 그렇지 않아.
특수요원 A │파크가 특별구와 곧 연결된다. 그 누구도 경계선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해.
특수요원 A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도 좋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
특수요원 B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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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정예 소대가 6팀이라니……
테스터 │저희 인원도 적진 않지만, 저쪽은……
스카이 │작전을 몇 차례 수행했던 터라 다들 체력이 바닥났을 테니,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가 가요.
스카이 │젤레나, 모두에게 전해요. 체력을 다한 사람은 핵심 부품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아무 부유 장치나 들고 서브 플랫폼을 지키기만 하라고요.
테스터 │……상대가 신제품의 정보를 몰라서 경계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스카이 │효과가 있길 바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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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 │휴우…… 다행히 딱 맞춰 왔네.
애스펜 │지금 이런 상황인데도 정말 이쪽으로 가시게요?
펀 │맞아, 여기가 공중 레스토랑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야.
펀 │내 낙하 장비를 매, 애스펜. 이제부턴 아주 위험할 거야.
애스펜 │그럼 당신은요?
펀 │나?
펀은 메이랜더 특수요원이 세운 봉쇄선을 바라보며 마치 반가운 상대를 만나기라도 한 듯,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촬영용 드론은 30분 전에 이미 7번 플랫폼에서 철수했고, 여기서 곧 벌어질 모든 일은 스튜디오의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다.
정면충돌은 불가피했고, 지연은 양측 모두에게 악수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묵묵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펀 │내 신호를 기다리는 다른 여행단이 있어.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된 줄무늬 깃발이 불쑥 솟아오른 가운데, 한 필라인 소녀가 확성기를 치켜들고 군중 속에서 뛰쳐나왔다.
펀 │내가 신분을 도용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들어온 첫날, 어느 친절한 안내원이 내게 말했어. "하늘이 더 이상 금지구역이 아니라면, 이 파크에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라고.
펀 │전시 구역에서 지하 실험실까지 돌아다니며, 나는 모든 기괴한 발명품과 발명품이 가진 복잡한 철학을 기억하고, 수십만 자에 달하는 해설문을 외웠어.
펀 │지금도 나는 하늘을 나는 토스터가 어느 회사의 제품인지, 몇 세대 모델인지까지도 말할 수 있어.
펀 │난 그 발명품들을 요란하게 칭찬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재미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아…… 부유 섹터가 떠오르는 건 죽음의 황무지에서 보는 일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펀 │그러다가 문득, 아빠가 끊임없이 내게 반복했던 "이야기는 언제나 해설보다 재미있다" 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어.
펀 │1인 가이드가 되고 몇 년 동안, 낙심한 일들이 정말 많았어.
펀 │눈에 보이는 게 진실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과장된 묘사나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꿈을 폄하해.
펀 │나는 예전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에 함부로 '불가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웃들과 함께 내 가족을 비웃는 그런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펀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에야, 나는 아빠가 한 말의 뜻을 진심으로 깨달았어.
펀 │그래서,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정말 해설자가 필요하다면, 나는 수많은 컬럼비아인에게 내가 이 파크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펀 │라이스 부쉬.
활기 넘치는 테스터 │어…… 엉?
펀 │벙커힐 시티의 구두장, 가장 큰 꿈은 쌍둥이 달에 발을 디뎌 신발 자국과 밑창의 로고를 남겨, 사람들이 천체 망원경으로 자기 가게의 이름을 볼 수 있게 하는 거지.
활기 넘치는 테스터 │하늘이 가장 큰 간판이니까……
펀 │오윈 프레데릭스.
점잖은 테스터 │……나야.
펀 │철물점 주인, 제2의 고리형 실험실에 있는 나사를 조여보고 싶다고 했어. 미래에 우주로 이주하게 되면, 그 경험을 내세워 가족들을 위해 자리 하나를 얻고 싶다고 했지.
점잖은 테스터 │미리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펀 │애스펜……
애스펜 │제가 직접 말하겠습니다.
애스펜 │애스펜, 잡화점 점장이고, 북노스빌 출신입니다.
애스펜 │사기를 당했고,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린 후, 가족들이 빚쟁이에게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애스펜 │그리고, '럭키 치스티비스트'라는 상호는 저와 제 아내가 함께 지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벌써 2년이나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애스펜 │고향을 떠나기 전, 아내가 제 걱정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저는 반드시 '럭키 치스티비스트'라는 이름을 TV에 나오게 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죠.
애스펜 │이제 저는 전시회가 거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캡슐이 전부 추락한다고 해도, '럭키 치스티비스트' 상표를 단 빨간 풍선만큼은 아내가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펀 │애스펜, 그리고 모두들.
펀 │우리가 원하는 게 현실에서 온 것이든, 공상이든, 맹목적인 것이든, 미신이든, 모두 메이랜더와 구스타브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
펀 │달려라, 뛰어라, 날아라!
펀 │우리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멋대로 우리를 막아버리고 바꾸려 하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 스스로 파크의 방향을 결정하는 거야!
펀은 선두의 파울비스트처럼 힘차고 우렁차게 외쳤고, 사람들은 그 뒤를 따르며 메이랜더 특수요원의 봉쇄선을 향해 주저 없이 돌진했다.
공중에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회수해 온 금지품을 실은 수많은 전시품들이, 서로 밀치고 압박하며 쟁탈하는 인파를 넘어 하늘 끝으로 날아올랐다.
황당무계했지만, 자유로웠다.
펀 │후우…… 드디어 빠져나왔어. 모두 고생했어, 조금만 더 버티자.
펀 │음, 금지된 핵심 부품 총 34개, 맞아…… 외형도 멀쩡해 보이네. 전시품의 낙하 모듈이 꽤 의지가 되네.
펀 │이 물건들을 고든한테 전달하기만 하면 내 임무도 끝나. 그쪽도 순조로웠으면 좋겠는데.
펀 │그럼 이제……
??? │그 물건 내려놔.
??? │그리고 돌아서.
펀 │너, 너는 구스타브가 데려온 그 과학 고문? 네가 왜 여기……
과학 고문 │……
ˇ
창밖에서는 특별구 정부 청사의 첨탑과 컬럼비아의 국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든은 생방송 화면의 왼쪽 아래를 바라보았다.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상의 빨간 점이 점점 특별구 섹터 표식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획대로였다면 그들은 10여 분 전에 이미 목록에 있는 장치들을 공중 레스토랑으로 보내와야 했다.
고든은 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초조함을 드러내면 구스타브는 분명 바로 알아차릴 것이니까.
고든 │……
구스타브 │계획이 생각보다 순조롭지 않은가 보군?
고든 │당신이야말로 생각보다 침착하군.
구스타브 │모험을 무릅쓰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다만, 자네에겐 모험을 평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지.
구스타브 │자네는 무모한 계획에 대비책을 채 마련하지 못했어. 지금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 자네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고든 │그렇다면, 당신의 대비책은 뭐지?
구스타브 │자신감을 되찾는 건 좋은 일이지만, 자신의 경쟁상대가 누군지 잊어선 안 돼. 내가 말했지, 우쭐대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될 거라고.
고든 │그게 무슨 뜻이지……
과학 고문 │……
구스타브 │늦었군.
과학 고문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고든 │당신의 과학 고문……
구스타브 │이 친구는 그냥 과학 고문이 아니야. 나도 내 계획을 위해 보험 하나는 들어둬야 했거든.
시커멓고 커다란 몸집의 쿠란타가 느긋하게 고든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방호재로 차단된 오리지늄 제품 34개가 든 무거운 상자를 가뿐하게 들고 있었다.
그는 상자를 고든에게 건넸다.
과학 고문 │당신이 부탁했던 물건입니다.
고든 │고생했어.
구스타브 │……!
구스타브 │지금 뭐 하는 거야?
고든 │난 당신의 제자야. 당신이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무엇을 선택할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고든 │경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대, 문무를 겸비한 과학 고문, 청문회와 계획의 순조로운 진행을 지켜주는 외부인.
고든 │안타깝게도, 사람을 잘못 본 거 같네.
고든 │……
과학 고문 │석화된 시본의 촉수로 만든 턴테이블? 이건 그냥 장식품입니까, 아니면 확실히 특정 기능을 대체하는 겁니까?
고든 │아, 그건……
과학 고문 │시본의 발성 기관을 이용해 레코드의 음을 자동으로 조율한 거군요……
과학 고문 │가장자리에 움푹 들어간 곳을 보니, 제작자가 시본이 음악에 맞춰 생체 구조를 조절하는지도 테스트해 본 것 같군요. 나쁘지 않은 발상이군요.
고든 │……
과학 고문 │이 금색 손뼈는 어디서 난 겁니까?
고든 │벽에 있는 건 사……
과학 고문 │선반 위의 심하게 풍식된 금색 손뼈와 한 쌍이군요. 그렇죠?
과학 고문 │관절에 사용된 부품과 손뼈의 마모 정도를 보니, 사르곤 서부 사막에서 발굴되었겠군요.
고든 │……
과학 고문 │어, 이 암호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단검은 꽤 낯이 익네요. 이건……
고든 │'이것들은' 원래 한 쌍이야!
고든 │사미의 한 제사장에게서 단검을 받아올 때, 제사장 말로는 연인 한 쌍이 피로 죽음의 저주를 걸어 만든 무기랬어. 주술로 움직이는 아주 날카로운 칼이라고……
과학 고문 │아, 저도 알고 있어요. 나머지 하나는 제 심장에 꽂혀 있었거든요.
과학 고문 │지금은 무뎌져서 전만큼 날카롭지는 않지만, 지팡이를 깎기에는 딱 좋습니다.
고든 │……
고든 │과학 고문 씨, 앞서 구스타브 앞에서 무례하게 굴었던 점 진심으로 사과하지. 내게 얼마든지 화를 내도 좋아.
고든 │다만,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아. 당신을 부른 건 정말로 볼일이 있어서 그래.
과학 고문 │만약, 조금 전 그 턴테이블의 구조 일부를 떼어내, 금속 손뼈의 감지 모듈과 결합한다면, 새로운 음성 내비게이션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과학 고문 │주술로 구동되는 칼날은 소모율이 극히 낮은 바늘로 쓸 수 있고, 림 빌리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고에너지 오리지늄 내연기관은 컬럼비아 표준보다 30배 높은 동력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과학 고문 │여기에 빅토리아에서 이미 단종된 에너지 전환 안정기와 컬럼비아 황무지에서 볼 수 있었던 주술 급류 초점까지 더해진다면……
과학 고문 │이동 섹터 동력층에 필요한 1차 핵심 장치를 하나 조립할 수 있겠네요.
고든 │……
고든 │내가 뭘 하려는지 알고 있었어?
과학 고문 │단 하나의 장치만으로 섹터 전체의 동력원을 바꾸는 건 상당히 위험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고든 │당신은 구스타브의 사람이 아니었어? 당신 정체가 뭐야?
과학 고문 │당신에겐 시간이 별로 없지 않나요?
과학 고문 │중요한 건, 제가 뭘 하면 되냐는 겁니다.
고든은 수집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쿠란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상대는 고든의 모든 소장품을 알아보았고, 그의 생각을 꿰뚫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털어놓기까지 했다. 마치 죽음을 뒤쫓으며 많은 곳을 다녀온 사람처럼……
고든은 이 쿠란타가 마치 자신의 생각이라는 궁전 안에서 느긋하게 산책하는, 무지한 듯 또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국왕 같았다.
사브라 꼬리 끝의 가시들이 다시 한번 곤두서더니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경계가 아닌, 승리의 확신 때문이었다.
고든 │동력 장치의 안정성은 어떻지?
과학 고문 │3일밖에 못 버팁니다. 연료가 부족하면 길어봤자 하루 반이죠.
고든 │충분해.
과학 고문 │정말 컬럼비아 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니죠?
고든 │내가 사적인 복수심 때문에 모두의 앞날을 내던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과학 고문 │당신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길 바라는 것뿐이죠. 그래야만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고든 │그런가?
과학 고문 │하지만 반역은 중죄입니다.
고든 │훗, 당신이 내 파일을 봤어야 했는데. 내가 짊어진 죄명은 충분히 무거워.
고든 │자, 물건을 중앙 통제실로 옮기는 거나 도와줘.
파울비스트의 날개, 버든비스트이 뿔, 맹글러비스트의 이빨, 샌드비스트의 가죽, 그리고 백비스트의 피…… 만약 34가지 생물로부터 일부씩을 떼어 조합한다면 어떻게 될까?
날카롭고, 괴이하고,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조립한 동력 장치를 바라보는 고든의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칠 듯이 흥분했다.
과학 고문 │섹터의 기존 동력 시스템을 끄고 장치를 연결했습니다.
과학 고문 │이제 당신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가 어디로 갈지 정하면 됩니다.
고든 │……
고든 │발령장을 받던 날, 나는 맹세했어.
고든 │이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있는 모든 새 발명품이 불꽃을 피울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지.
고든 │아무리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라고 해도 나는 진짜로 만들어주고 싶었어. 다시는 사람들이 내가 관리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타인이 만든 규칙 속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억지로 인정해야 하는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했어.
고든 │지금도 내 역할은 똑같아. 다른 게 있다면, 그냥 이 파크의 엔진에 불을 붙여, 파크를 아무것도 없는 황야로 도망치게 하는 것뿐이지만.
고든은 동력장치의 괴상하게 생긴 레버를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고든 │자, '프로펠러 파라다이스', 특별구와 작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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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요원 │『장관님, 7번 부유 플랫폼 쪽에서 펀이라는 녀석이 파크 사람들을 데리고……』
틴맨 │……감시카메라에서 보았습니다.
특수요원 │『 공중 레스토랑 쪽에서는 구스타브가 고든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
특수요원 │『 라인 랩의 장치나무를 감시하던 동료 쪽에서 온 소식인데, 내스티가 봉쇄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저희 요원들이 쫓으려 했지만 살카즈 주술로 추정되는 힘에 가로막혔다고 합니다. 』
틴맨 │베일라……
틴맨 │우선은 인력을 동원해 상황부터 통제하세요. 라인 랩 쪽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틴맨 │빅 래리, 올드 켈리, 리틀 모! 우리 옛 친구를 데리러 갈 시간입니다…… 죽기 직전에 미쳐버린 밴시를 처리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로울 겁니다.
틴맨 │머시, 당신은 여기 남아도 되고, 다른 동료들을 도와줘도 됩니다.
머시아 │……
머시아 │아니요,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선배님.
빅 래리&올드 켈리&리틀 모 │……
틴맨 │아니, 셋 모두……
틴맨은 레버넌트 친구들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올드 켈리는 능숙하게 지팡이를 휘두르며 즉흥 탭댄스를 췄고, 빅 래리는 머시아의 머리 위에 엎드려 눈물을 글썽였다. 그가 뭘 떠올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리틀 모는……
입에서 기합소리가 나왔다. 틴맨은 분명 똑똑히 들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카즈델로 돌아온 듯했다. 그는 자신을 용광로에 처넣으려는 엘더 레버넌트를 향해 리볼버를 꺼내 들고 탄창을 한 번에 쏟아부었다.
틴맨 │다리가 좀 저리고, 머리도 살짝 어지럽군요……
머시아 │외골격을 너무 오래 관리하지 않아서 그런가요?
틴맨 │아무리 관리를 안 해도, 이 머리는 녹슬지 않습니다.
틴맨 │오리지늄 아츠를 다루는 솜씨가 꽤 늘었나 보네요. 올드 켈리가 그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몰수했는데도, 당신은 저 친구들을 기억의 소용돌이에 던져넣었군요.
틴맨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요…… 저 셋이 너무 오래 살아서 쌓인 기억이 많다 보니 다루기가 오히려 쉬웠던 겁니까?
머시아 │320배속으로 돌려도, 각자의 인생 영화를 단숨에 끝까지 재생할 순 없어요. 더군다나, 멈춰서 다시 봐야 할 장면도 얼마나 많은데요……
머시아 │정말 죄송해요. 선배님.
틴맨 │저한텐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머시아 │네, 분명 선배님은 곧 기억의 속박을 떨쳐버릴 거예요. 오올헤약 선배의 임무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선배님의 머리를 베어냈음에도 선배님을 완벽하게 통제하진 못했다고 적혀있었어요.
머시아 │그래서 저도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선배님이 파크 사람들을 막으러 가는 걸 조금이라도 늦출 거예요.
틴맨 │당신은 아주 뛰어난 메이랜더 특수요원입니다, 머시.
틴맨 │당신은 임무 종료 후에 오리지늄 아츠 또는 다른 수단으로 당사자의 기억을 지우는 일을 담당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해왔어요.
틴맨 │하지만 이번은 그 상대와 타이밍을 잘못 고른 거 같군요.
머시아 │……
머시아 │아까 제게 제 성을 잊지 말라고 하셨죠…… 저는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머시아 │그 저택에서 자란 '셀레네'라면 누구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틴맨 │……재단의 전신인, 메이랜더 셀레네의 그 '보육원'이군요.
머시아 │……우리의 '집'이죠. 적어도 어릴 때는 우리 모두 셀레네 씨를 진짜 할아버지로 생각했으니까요.
머시아 │그에 관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머시아 │8살이 되던 해, 학교에서 돌아와 막 차에서 내리자마자, 원래라면 제 방에 있어야 할 인형이 정원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며 잔디밭에 물을 뿌리고 있었어요.
머시아 │그 인형은 제게 남은 하나뿐인, 친어머니와 관련된 물건이었어요. 저는 친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어머니가 제게 인형을 꿰매 주실 때 손가락의 반지가 불빛 아래서 반짝였던 건 기억해요.
머시아 │할아버지는 저와 한 마디 상의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인형을 물뿌리개로 개조했어요. 꼭 그 인형이 그러려고 만들어진 것처럼.
머시아 │저와 함께 자란 아이들 모두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머시아 │선배님은 할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알고 계시겠죠. '연방의 아버지'의 인식 속에, 컬럼비아는 이제 갓 개척지에서 벗어나 이 대지에서 가장 젊은 나라가 된 곳이자, 새로운 것만 존재하는 곳이어야 했어요……
머시아 │과거의 것들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면, 그건 오로지 전진과 개척을 위해 사용될 뿐이었죠.
머시아 │우리가 빅토리아의 이민자가 되었든, 가울의 난민이 되었든 상관없었어요. 우리의 생부와 생모가 파산자였든, 사형수였든 중요하지 않았죠.
머시아 │할아버지는 우리가 컬럼비아의 자녀가 되길, '셀레네'가 되길 바랄 뿐이었어요. 그래야만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생기니까요.
머시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금의 모든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요.
틴맨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머시아 │선배님이 긴 세월 동안 겪은 것들이 제게는 영원히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하지만 메이랜더 재단도, 대통령님도, 부통령님도, 분명 더 많은 문제를 고려해야 했겠죠……
머시아 │카시미어 기동 장갑의 분석 보고서를 봤어요. 그들은 가울 올드 가디언의 기술을 해체해 분석했고, 역대 기사의 뼈와 피를 이용해서 '전달물질'보다 더 뛰어난 효과를 만들어냈더군요.
머시아 │저는 라이타니엔의 '아츠 작전 기초' 교재도 읽었어요. 10년 뒤면, 그들도 전시 상황에서 라테라노처럼 전 국민을 병력으로 동원하는 국가가 될 게 예상되더군요.
머시아 │저는 메이랜더가 왜 컬럼비아가 뒤처졌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시기적절한 군비경쟁이 어떻게 컬럼비아를 '정상 궤도'로 되돌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어요.
머시아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여러 번 강조해신 기준으로 판단하자면, 국가 전체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이보다 더 가성비 좋은 계획이 없다는 건 분명해요.
머시아 │전 그 '억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저더러 해결하라고 했다면 아마 저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울음을 터뜨렸을 거예요.
머시아 │그렇지만 선배님, 지금의 저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어요.
머시아 │우리처럼 갈 곳 없는 고아들도 컬럼비아의 아이가 될 수 있다면……
머시아 │딸을 찾으러 먼 길을 걸어온 어머니, 처자식이 고리대금 업체에게 빚 독촉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걸 건 상인, 그리고 그저 살길을 찾으러 온 것뿐인 테스터들……
머시아 │왜 그들이 컬럼비아의 미래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야만 하나요?
머시아 │선배님, 제 일은 사람들이 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머시아 │만약, 당신들이 약간의 대가를 지불해 컬럼비아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하기로 결정한 거라면, 저는 선배님이 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선배님이 그 대가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꿈이 있는지를 똑똑히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머시아 │그런 것들을 파괴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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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라 │……
내스티 │……
내스티는 뒤엉킨 뿌리 사이에 박힌 어렴풋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스티의 오랜 지인이자, 어머니였다.
회백색의 뿌리줄기가 베일라의 두 다리를 대신하고 있었고, 비늘처럼 겹겹이 포개진 나무껍질이 베일라의 드레스와 피부를 타고 올라가며,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을 모호하게 새겨넣었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나뭇진이 장막처럼 쏟아졌고, 베일라의 얼굴을 가렸다. 간청하는, 몸부림치는 수많은 손이 장막 속에서 뻗어 나와, 동아줄을 잡 듯 베일라의 목을 꽉 조였다.
사람도, '나무'도 너무 낯설었기에, 내스티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내스티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눈앞에 펼쳐진 모든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내스티 │설마 자신을, 그 '나무'에 넣어버린 거야?
베일라 │추락…… 네가 돌아오는 길이 무너지고, 추락하는 걸 봤어. 내스티, 네가 집으로 오는 길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어.
베일라 │내 주문은 산산조각 난 그 길까지는 닿지 못해. 하지만 이 횃대나무의 뿌리라면 닿을 수 있어.
베일라 │……내가 나무에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
내스티 │(살카즈어) 해리하라!
내스티의 주문은 응답받지 못했다.
내스티 │나무의 설계는 물론 밴시의 문법을 바탕으로 했어. 아직 결함이 많긴 하지만, 한 번도 내 주문을 거부한 적은 없었는데……
베일라를 둘렀나 나뭇가지는 여전히 소리 없이 뻗어가고 있었다. 그 가지들은 나부끼는 몸을 끌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스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스티 │베일라, 멈춰…… 그래야 내가 당신의 상태를 분석할 수 있어.
내스티의 부탁도 응답받지 못했다.
베일라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만 하고 있었다.
베일라 │협곡 밖에선느 무심과의 열매를 구할 수 없었을 텐데, 내스티…… 깃뿔은 어떻게 닦았니?
베일라 │게다가, 주문을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이젠 사용할 줄 아는 것 같구나.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어떻게……
베일라 │그리고, 네 골필 말인데, 너의, 너의……
내스티 │그건 중요하지 않아, 베일라. 내가 알고 싶은 건, 여기서, 당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야.
베일라 │중요하지…… 않다고?
베일라는 돌연 침묵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뻗어 나오던 나뭇가지도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뒤, 나뭇가지들은 다른 쪽을 향해 뻗어가며, 베일라의 남은 몸을 집어삼켰다.
내스티 │결합이…… 심해지고 있어?
베일라 │이 횃대나무가 네 기억을 내게 나눠줬어. 네가 어딜 갔는지, 뭘 했는지……
베일라 │이 나무가 내게 더 중요한 일을…… 더 많은 걸 알려줄 수 있을 거야.
베일라 │나는 네가 리치의 도서관에서 잠도 안 자고 답을 찾는 모습을 봤어…… 눈이 나빠졌을 텐데, 그런데 그 고약한 프레몬트는 결국 널 쫓아냈더구나.
베일라 │내가 알려줘야 했어. 너는 절대 미련한 아이가 아니라고, 그건 전부 나 때문이라고……
베일라 │나는 네가 매일 깃뿔을 꽁꽁 감고 파울비스트의 털을 잔뜩 붙인 모습도 봤어. 산크타의 도시에 숨어 약간의 식량을 모으기 위해……
베일라 │하지만 깃뿔은 그런 자극을 견디지 못해. 네 오른쪽 깃뿔이 더 자라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니?
베일라 │네가 높은 철제 선반 위에서 자는 모습도 봤다. 나뭇잎 지붕도 없고, 그 위에 오두막을 짓지도 않았어…… 그냥 철판 하나만 걸쳐 두고 그렇게 자고 있더구나……
베일라 │불편하지 않았니……? 어디 아프진 않았어?
내스티는 끝없이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록 목소리는 일그러져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걱정 섞인 말투만큼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베일라는 협곡에서도 이렇게 잔소리를 했다.
내스티는 문득 눈앞의 이 형체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난제도, 시급히 치료해야 할 환자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걱정이 많은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해받는 것이었다.
내스티는 천천히 손에 쥔 골필을 내려놓았다.
내스티 │펀이 당신을 막 발견했을 때, 당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말해줬어. 술식의 흔적, 총탄의 자국, 모래바람이 남긴 상처……
내스티 │내가 걸어온 길을 당신도 모두 걸어왔네. 더 힘들고, 더 고통스럽게.
내스티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그대로 협곡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베일라 │나는 더 이상 협곡을 위해, 라케라말린과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내스티 │당신은 충분히 많은 걸 했어. 당신이 모든 밴시를 위해 지어낸 그 거짓말들……
베일라 │역시…… 그 거짓말로는 널 속일 수 없었구나.
내스티 │당신을 따라 협곡으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 이미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어.
베일라 │……
베일라 │그 거짓말을 나는 200년이나 지켜왔어. 그건 협곡 '집사'로서의 가장 큰 성취이자, 가장 큰 죄이기도 해……
내스티 │200년…… 그 전쟁을, 말하는 거야?
베일라 │그래.
베일라 │늙은 마왕은 너무 무능해서, 왕정은 물론이고 외부인조차 그를 꼭두각시로 이용해 살카즈를 통제하려고 했어.
베일라 │애초에 액운의 해였어. 재앙이 그 땅을 갈아엎자마자, 연합군이 또 포화로 그 땅을 휩쓸었으니.

베일라 │그 녹색 필라인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뒤에는 엄청난 규모의 강철이 있었지. 어떤 게 증기 기사이고, 어떤 게 고탑 캐스터인지, 어떤 게 올드 가디언인지…… 구분할 수 없었어.
베일라 │나는 그들이 언제부터 커다란 강철 함선과 불을 뿜는 대포를 갖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어.
베일라 │내가 기억하는 건, 산더미 같은 웬디고도 함선에 짓밟힐 때 그저 처량한 소리만 낼 뿐이었고, 우리 일족이 불타며 추락하는 모습은 마치 실이 끊어진 연 같았어.
베일라 │그날 전장에 메아리치던 그 통곡의 울부짖음, 그건 아마 아무도 잊을 수 없을 거야.
내스티 │……밴시의 울부짖음.
베일라 │심지어 우리는 사람을 죽이고 있는지 장례를 치르고 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어. 그저 애달프게 울고 소리칠 뿐, 제대로 된 엘레지 한 곡조차 끝까지 부르지 못했지.
베일라 │연합군이 카즈델에서 철수했을 때, 우리 종족은 천 명도 채 남지 않았어. 그리고 그중 절반은 목소리를 잃었지.
내스티 │……
베일라 │태생적으로 밴시는 살카즈의 모든 전쟁에 참여해 왔지만, 그렇게 참혹한 사상자는…… 전대미문이었어.
베일라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고, 그 피로 얼룩진 슬픔의 땅을 떠나 뭐라도 살아 있는 땅으로 도망쳤어.
내스티 │협곡인가?
베일라 │맞아, 협곡.
베일라 │넓은 안개 호수가 협곡을 바깥세상과 자연스럽게 격리시켰고, 언제나 황금빛인 밀림은 계절을 붙들어 둔 듯했지. 협곡 전체가 마치…… 살카즈의 땅이 아닌 것처럼 고요했어.
내스티 │살카즈의 것이 아니라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베일라 │맞아…… 그때의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나, 라케라말린, 그리고 막 왕관의 선택을 받은 전하까지도.
베일라 │살카즈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지.

베일라 │나와 라케라말린은 남은 일족을 데리고 협곡으로 왔어, 안개 호수 근처에 부두를 세우고 밀림에 정원을 지었지.
베일라 │우린 처음으로 밴시의 노래에 생명을 상징하는 부호를 써넣었고, 주문을 외워 나무에 탐스러운 과실을 맺게 했어. 그리고 넝쿨을 움직여 구불구불한 현수교를 놓았지.
베일라 │그렇게 밴시가 처음으로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할 수 있게 됐어. 더 이상 부고를 전하는 길에서 밤을 이불 삼아 잠들지 않아도 됐지.
베일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 밖의 '증표'가 또다시 눈송이처럼 밀려들었어.
내스티 │죽음을 알리는 '증표'인가?
베일라 │……그래.
내스티 │아무리 테레시아와 테레시스라고 해도 전쟁이 남긴 문제를 그렇게 빨리 해결할 수는 없었겠지.
베일라 │맞아. 전쟁의 불씨가 꺼졌어도 죽음은 여전했어.
베일라 │그때 우리가 심은 열매는 이제 막 첫 수확을 맞이했어. 말리고 보니 양이 아주 적었는데, 수백 명이 가장 추운 겨울 1달을 겨우 지낼 수 있는 양이었지.
베일라 │하지만, 내 방에 쌓인 '증표'들은…… 뱀파이어가 마지막으로 응고시킨 혼탁한 핏빛 결정, 나흐체러르가 마지막으로 벗은 낡아빠진 수의, 디얄이 마지막으로 만든 장미 같은 심장……
베일라 │그것들은 우리가 말린 과일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쌓였어. 만약 그때 협곡을 나와 죽은 자들을 위한 장례를 치렀다면……
베일라 │우린 원래의 길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 변화의 계기는 수천만 동포의 목숨을 대가로 얻은 것인데.
내스티 │그래서, 당신이 모든 밴시를 대신해 결정을 내렸군.

베일라 │내가 결정했고, 내가 라케라말린을 설득했어.
베일라 │그 이후로, 나는 협곡 밖에서 들어오는 모든 죽음을 알리는 '증표'를 가로챘어.
베일라 │간혹 협곡을 떠나 동포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밴시도 있었지만, 난 그 수와 빈도를 교묘하게 잘 조절했지…… 그 때문에, 라케라말린이 협곡 밖에서 의심과 비난을 적지 않게 받았어.
베일라 │그 시절 동안, 우리는 밴시가 정말 천성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밴시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살카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베일라 │비록 그 대가가, '증표'의 주인 대부분이 인도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살카즈의 영혼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베일라 │비록 그 대가가, 천성을 거스른 밴시가 죽기 직전 일생의 공허함에 잠식돼, 길고 고통스러운 망각을 겪게 되더라도 말이야.
베일라 │그런 식으로 200년 정도를 보냈어.
베일라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스티.

내스티 │……그래서, 나는 떠나야만 했어.
내스티 │달마다 당신이 모두에게 알렸던 죽음의 소식은 얼마나 됐지? 카즈델에서 하루에 죽어가는 인간이 그보다 더 많았을 텐데.
내스티 │당신이 그들을 속일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난 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있었어.
베일라 │……라케라말린 말이 맞아. 너는 너무 영리한 아이였고, 더군다나 카즈델에서 자랐으니…… 내가 널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지.
베일라 │그럼에도 나는 네가 협곡에서 살길 바랐어.
베일라 │내게 무시당했던 수천만의 영혼 중에 너의 생모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내가 그 염원을 제때 들어주지 못해, 네게 행복한 유년 시절을 빚졌기 때문도 아니었어.
베일라 │그리고 이런 희망도 갖고 있기 때문이었어. 살카즈가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만든 '협곡'이라는 쉼터가, 200년 동안의 운영 끝에 적어도 바깥에서 온 아이 하나쯤은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
베일라 │나는 나의 거짓말을 제일 잘 꿰뚫어 볼 것 같은 그 아이를 내 딸로 삼았어.
내스티 │하지만 당신은 결국 조심스럽게 나를 다른 밴시로부터 격리했지.
내스티 │협곡에 건 기대가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았던 거지?
베일라 │나는……
베일라 │나는 평생 많은 잘못을 범했어, 내스티. 그중에서도 네가 떠난 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잘못이야.
베일라 │너는 항상 이해심이 많은 아이였어. 만약 내가 진작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더라면…… 넌 분명 날 이해했을 거고, 날 도왔겠지.
베일라 │그랬다면, 그날 너는……
내스티 │아니, 그래도 나는 떠났을 거야.

내스티 │나는 우리가 헤어진 그날을 기억하고 있어.
내스티 │당신은 나를 불렀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숙여 수면을 봤어.
내스티 │그날의 안개 호수는 바람이 없었고, 배는 마치 종이를 자르는 칼처럼 수면을 갈랐지, 잔물결조차 일지 않았어. 그래서, 사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어.
내스티 │내가 협곡을 떠나겠다고 했을 때, 당신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 워낙 작아서 당신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내스티 │마음속으로는 내가 떠나길 바랐던 거지?
내스티 │그날의 이별은 만회하지 못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과 나의 공모야.
베일라 │……
내스티 │베일라,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어?
내스티 │당신에게 있어서, 나보단 그 협곡이 딸에 더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내스티 │당신이 그곳을 발견했고, 당신이 살카즈의 미래를 거기에 맡겼어. 200년 동안, 당신은 물과 배, 과일과 과자로 그곳을 장식했어.
내스티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이 더욱 소중해졌지.
내스티 │당신은 나를 협곡으로 데려간 이유가 두 가지라고 했어. 첫째, 협곡이 치른 대가를 보충하기 위해서. 둘째, 협곡이 당신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스티 │내가 떠난 건, 당신에겐 일종의 해방이었을 거야. 왜냐하면, 협곡을 지탱하던 그 나약한 거짓말을 들춰낼 인간이, 떠났으니까.
내스티 │하지만 동시에 당신에겐 고통이기도 했을 거야. 왜냐하면, 200년이 지나도 협곡은 결국 당신이 원했던 것처럼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했으니까.
내스티 │너무나도 취약했기에, 카즈델에서 자란 아이 하나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렇다면 모든 살카즈의 미래가 귀속될 보금자리가 되는 일은 더 이뤄질 수 없었을 테니까.
베일라 │내스티, 그만……
내스티 │베일라, 아직 구별할 수 있겠어?
내스티 │당신은 협곡을 도망쳐 여기까지 왔어. 그리고 자신을 이 횃대나무처럼 생긴 '나무'에 결합했지…… 근데, 그게 과연 나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당신을 위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어떤 억울함 때문일까?
내스티 │베일라, 당신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지?
내스티 │죽음? 실패? 아니면 곧 죽을 자신이 그 실패한 협곡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내스티 │알려줘, 나를 이해시켜줘. 그래야 내가 이 잘못된 결합을 끝낼 수 있으니까.
베일라 │……!
작전 후
특수요원 A │움직이지 마.
펀 │말로 해, 말로 하자니까. 앗……
특수요원 A │폭동 가담자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
특수요원 B │지하 감옥에 가뒀다가 특별구 법정에 넘겨.
특수요원 B │곧 작전 시간이다. 혹시 모르니 모두 낙하 장비를 다시 한번 체크해.
특수요원 B │무슨 일이야! 누가 벌써 기폭 버튼을 눌렀는데?
특수요원 A │그럴 리가. 섹터가 특별구까지 몇백 미터밖에 안 남았는데…… 잠깐, 정부 청사의 첨탑을 봐. 우리 지금 특별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거지?
펀 │계획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특수요원 B │……
특수요원 B │처음부터 폭발을 직접 막을 생각이 아니라, 섹터의 방향을 바꾸려고 시간만 끈 거였어?
펀 │우리에겐 숙련된 특수요원들이랑 맞설 만한 힘이 없는걸?
특수요원 B │……계획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특수요원 B │임무를 변경한다.
특수요원 B │아래층에 주둔 중인 요원들은 계획된 루트로 철수해. 위층에 있는 팀은 주변의 민간인들을 보호하고 낙하를 준비한다.
특수요원 B │0번 지점, 기폭.
ˇ
오클리 │무슨 일이지! 스튜디오의 화면이 다 꺼졌네…… 밖의 생방송 화면에는 신호가 잡히나요?
테스터 │지금 생방송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에요! 감독 협회의 대피 안내를 못 들었어요?!
테스터 │부유 구조층에 심각한 에너지 사고가 발생했어요. 10분도 안 돼서, 모든 부유 시설이 연달아 추락할 거예요! 어서 비상 시설로 대피하세요!
오클리 │추락이요…?
오클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수백 개의 소형 부유 캡슐이 600미터 상공에서 불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 가득 흩날린 재가 맑은 하늘을 전부 뒤덮었다.
햇빛이 사라지자, 구름처럼 가볍고 투명하던 캡슐은 다시 본래의 무거운 금속 덩어리가 되어 파크의 하층부를 향해 회전하며 떨어졌다.
??? │조심하세요.
오클리 │커헉…… 큰일 날 뻔했네요. 고마워요.
오클리 │어? 그런데 어느 과학기술 기업의 테스터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테스터? │……
테스터? │지금은 제 소개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오클리 씨.
테스터? │같이 엄폐물로 쓸 만한 것들이 별로 없어서, 떨어지는 파편에 다칠 거예요. 어서 비상 시설로 대피하세요.
오클리 │아, 알겠습니다……
ˇ
추락.
통제할 수 없는 추락.
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그녀는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헬멧 양쪽에 달린 벨트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 있었고, 덕분에 그녀는 추락에 대한 공포를 잊었다.
기폭 장치의 신호가 연결된 파이프라인을 따라 순식간에 부유 시설 전체에 불을 붙였다. 7번 플랫폼이 동력을 상실하기 직전, 그녀는 땅으로 몸을 날렸다.

추락하는 캡슐이 시커먼 유성처럼 굉음을 내며 펀의 곁을 스쳐 갔다.
캔디색 광고 물감이 거대한 불길에 타올랐고, 녹아 끊어진 플렉스 와이어는 기류를 타고 흩날렸으며, 공기 중에는 타르의 쓰디쓴 냄새가 가득했다.
부유층 전체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공중에서 아련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럭키 치스티비스트', '싱글 부츠', '파라솔'……
펀은 자신과 함께 추락한 회사의 상표들을 식별하며, 이 정도면 죽음의 황무지 일몰에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애스펜 │펀 씨, 낙하산을 펴세요!
펀 │아, 깜빡했네.
상승기류가 필라인을 가볍게 떠받쳤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함께 모여든 낙하산이 커다란 구름의 형상을 만들었다.
애스펜 │우리, 성공인가요?
애스펜 │지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죠. 자신의 투자와 제품이 잿더미가 된 걸 보면 충격이 클 텐데……
펀 │그 사람들은 그래도 안전하잖아. 섹터가 서둘러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부유층의 커다란 잔해들이 그대로 파크 아래층으로 떨어졌을 거야.
펀 │게다가, 그 사람들은 누군가가 단지 자기들의 꿈을 단념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음모를 꾸몄는지 영영 모를 거야.
애스펜 │……
애스펜 │이제 우린 어디로 가면 됩니까, 펀 씨?
펀 │애스펜, 이제 북노스빌로 아내를 만나러 가도 돼.
애스펜 │물론이죠. 하지만 그 다음은요?
펀 │그다음?
펀 │우리가 다시 땅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타오르는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완전히 변해버린 파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다.
특별구와 파크 사이의 황무지에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의 잔해가 마치 반송된 선물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펀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파라다이스'와 함께 추락해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ˇ
노쇠한 밴시는 200년 전의 그 전쟁을 회상하며, 동족이 불타 추락하던 모습이 꼭 실이 끊어진 연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몸부림치며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너무 많은 실로 땅에 매여 있는 연처럼, 셀 수 없는 뿌리와 가지가 흔들리는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바라던 대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연이 되었다.
베일라 │횃대나무…… 내가 그 나무에 지어준 이름이야. 나는 그곳이 모든 밴시의 귀착지가 되기를 바라며 그 나무 밑에 오두막을 지었지.
베일라 │하지만, 라케라말린이 나를 그 나무 아래로 데려갔을 때…… 내가 느낀 건 공포뿐이었어.
베일라 │그 나무는 아주 커다란 공동 같았어. 달빛도, 촛불도, 반딧불도 그 어둠을 밝히지 못했어.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나의 기억을 조금씩 빨아들이고만 있었지……
베일라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시들어가는 냄새를 맡았어. 그건 우리가 고칠 수 없는, 토석의 아이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냄새였어.
베일라 │매 순간, 그 냄새는 협곡이 얼마나 슬픈 곳인지 나에게 알려주었어.
베일라 │전하와 장군은 결국 전쟁과 죽음으로 살카즈의 내일을 얻어냈고, 아이파닐 그 아이는 지금도 밴시를 위해 새로운 미래를 찾고 있지.
베일라 │하지만 나의 전부, 나의 협곡은…… 소리 없이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실패한 피난처일 뿐이야.
베일라 │더 이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내스티 │그래서 횃대나무에서, 죽음에서 도망쳤구나.
내스티 │그런데 왜 여기지?
베일라 │협곡 밖의 땅은 다 똑같았어. 어둡고, 혼란스럽고, 방향조차 알 수 없지.
베일라 │그때 내가 기억하는 길은 하나뿐이었어. 그날 네가 말했던 낯선 이름들…… 라이타니엔, 라테라노, 컬럼비아……
베일라 │나는 그 이름들을 따라, 네 숨결을 따라왔어…… 결국 어디로 가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단지…… 그 나무에게 삼켜지고 싶진 않았어.
내스티 │하지만 당신은 결국 또 다른 나무에 들어갔잖아.
베일라 │처음에 네가 이곳에 또 다른 횃대나무를 심은 걸 봤을 때, 난 슬플 뿐이었어.
베일라 │그날, 이 시들어가는 기운이 여기 퍼져 있다는 걸 느꼈을 때…… 나는 네가 우리의 전철을 밟으려는 줄 알았어.
베일라 │협곡의 횃대나무를 어떻게 해도 구할 수 없다면…… 나는 이 나무를 위해서라도 뭐든 하고 싶었어.
베일라 │그저 시드는 걸 조금이라도 늦춰서, 너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어.
베일라 │하지만 나무를 마주한 순간 나는 알았어…… 내가 나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무는…… 나를 살릴 수 있겠다고.
베일라 │횃대나무는 내 기억을 뽑아갔지만, 이 나무는 내게 기억을 나눠주었어.
베일라 │협곡의 이야기, 그리고 너의 여정…… 이 나무 덕분에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어.
베일라 │미안해, 내스티, 정말 미안해. 너를 위해 그 무너진 길을 다시 잇기 훨씬 전에, 나는 이 나무와 하나가 되었어. 내가 다시 한번…… 널 속이고 말았어.
내스티 │……그래서 지금은 기억이 또렷한 거구나.
내스티 │그것 때문에 '나무'가 평소와 다르게 내 주문도 배척하고 있는 거겠지. 당신이 문법과 작동 로직을 완전히 바꿔놓았네.
내스티 │지금 이 나무는 당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당신은 나무의 작동을 유지하고 있어. 둘 다 모두 원래와 다른 존재가 되었지만.
내스티 │마치 꼭 서로의 결함에 기대서 실행하는 프로그램 같아……
베일라 │결함…… 프로그램?
내스티 │……마치 자신에게 기생하고 있는 덩굴 덕분에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고목처럼.
베일라 │그것도 나쁘지 않잖아?
베일라 │이렇게 해서라도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뭔가를 이루게 된 거야. 너를 위해, 밴시를 위해, 그리고 살카즈를 위해.
베일라 │내가 이 나무를 데리고, 너를 데리고 함께 협곡으로 돌아갈 수 있어.
내스티 │그건 의미가 없어.
베일라 │……!
베일라 │어째서…… 이 나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어……
내스티 │그렇다면 효과가 있다는 거군.
찰칵 소리와 함께, 내스티 허리춤에 있던 장치의 케이스가 떨어지며 종이테이프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형태 없는 설계도를 따르듯, 테이프들은 내스티 주변에서 펼쳐지며 치밀한 프레임 구조를 구성했다.
테이프마다 빽빽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는데, 그것은 주문이었다. 그것들은 내스티만의 문법을 구축하고 내스티만의 규칙을 수호하며, 미친 듯이 뻗어 나가는 뿌리줄기와 나뭇가지들을 밀어냈다.
내스티 │말했지, 나는 여기서 발생한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고. 그래야 잘못된 결합을 끝낼 수 있다고.
내스티 │이제 충분히 이해했어.
내스티는 펜을 들어, 함수와 주문을 써 내려갔다.
내스티 │(살카즈어) 재구성.
베일라 │안 돼…… 나무가 내게 나눠준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어.
베일라 │내스티…… 내스티! 뭐 하는 거야!
내스티 │지금 '나무'에 미리 로드했던 데이터를 모두 지우는 중이야. 나무가 공유한 모든 데이터는 그냥 실험용 임시 데이터일 뿐이거든.
내스티 │당신이 잊고 싶지 않은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기억하고, 남기고 싶은 게 실험용으로 짜맞춘 임시 데이터는 아닐 거잖아.
베일라 │내스티, 그래도……
베일라 │적어도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네가 스스로 자신의 심혈을 파괴하는 장면이 되진 않게 해줘……
베일라 │이것 때문에 그렇게 먼 길을 걸었고,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는데……
내스티 │당신은 협곡을 자신의 심혈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심혈'이라는 게 존재했던 적이 없어.
내스티 │내겐 목적이 있고, 이 '나무'는 그 수단이야.
내스티 │이에 대한 나의 판단은,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쏟아부었는지가 아니라,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없는지야.
내스티 │당신은 결합을 통해 이 '나무'를 영원히 시들지 않게 하고 싶겠지만,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고 해서 더 쓸모 있어지는 건 아니야.
내스티 │……마치 협곡의 횃대나무처럼.
내스티 │너무 잔인한 말은 하고 싶진 않지만, 횃대나무는 애초에 죽음을 앞둔 이를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없어. 그것은 단지 주문의 무게로 휘어버린 매량나무일 뿐이니까.
내스티 │타르강길스 고목과, 매량나무속, 테라 남동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자재용 수목. 라인 랩에 들어온 후, 내가 엘프 동료에게 다시 한번 확인받았어.
내스티 │그 나무가 협곡의 횃대나무가 될 수 있었던 건, 당신이 그걸 상징으로 삼기를 원했고, 나무의 변화를 슬퍼했기 때문이야.
내스티 │하지만 나무가 시든 건 그저 자연스러운 생명 주기의 끝에 다다랐을 뿐이야.
베일라 │단지, 그것뿐인가……
내스티 │심지어 줄기에 흐르던 그 광채조차도, 아마 오랫동안 주문을 받은 결과에 불과할 거야.
베일라 │나무가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이젠 기억이 안 나……
베일라 │하지만 내스티, 정말 그렇다면……
베일라 │너는 어째서 네 나무를 횃대나무와 비슷하게 만들었니?
내스티 │당신을 떠올리게 해주니까.
내스티 │당신이 나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베일라 │……
내스티 │베일라, 내가 왜 이 '나무'를 심었는지 알아?

내스티 │난 아직 우리가 헤어지던 그날을 기억해.
내스티 │당신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어. 얼굴을 마주하면, 어떤 말들은 차분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물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봤어……
내스티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었으니까.
내스티 │눈물이 자연스럽게 눈물 자국을 따라 흘러내렸어. 마치 눈물이 흐르는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스티 │나는 협곡에서 당신과 함께 십수 년을 살았어. 마지막까지도 내 기억 속의 당신은 한순간도 눈물 자국이 사라진 적이 없었어.
내스티 │협곡에서의 생활은 정말 좋았어. 카즈델과 비교하면 나는 몇 번이라도 협곡을 선택했을 거야. 하지만, 베일라……
내스티 │협곡에서의 200년 동안, 당신은 단 한순간도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 그렇지 않아?
내스티 │처음에는 내가 쉬운 방법으로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당신을 웃길 수 있다고 생각했어.
베일라 │네가 무심과의 열매로 내 얼굴을 하루 종일 닦았지……
내스티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알게 됐어.
내스티 │당신이 고통받는 근원은 바로 그 결정과 그 거짓말이었어.
내스티 │천성을 거스른 탓에 끝내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한 동족, 그리고 인도해 줄 이가 없어 영혼들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동포.
내스티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는 반드시 밴시의 문제, 모든 살카즈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해.
내스티 │하지만 그 해답은 협곡 밖에, 카즈델 밖에, 이 대지의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있어.
내스티 │바로 내가 이렇게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베일라……
내스티 │나는 당신과 함께 하늘에서 배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
베일라 │물에 비친 하늘인가……
내스티 │그날은 분명 바람이 없는 날이었지. 하지만, 한순간이었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잔물결이 일었고, 당신 얼굴의 지울 수 없던 눈물 자국이 지워졌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내스티 │그 뒤로, 당신을 미소 짓게 만들고 싶을 때면 나는 하늘을 생각해.
내스티 │어쩌면……
내스티 │우리가 머물 곳도, 우리 영혼의 안식처도, 모두 하늘에 있을지도 몰라.
내스티 │(살카즈어) 하늘은, 살카즈에게 허락된 땅이기도하니까.
베일라 │네가 바깥에서 한 모든 일, 그리고 이 하늘에 떠있는 '나무'는……
내스티 │모두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내스티 │감시카메라 화면 보여줘.

베일라 │추, 추락…… 실이 끊어진 연처럼……
내스티 │아무래도 메이랜더는 결국 목적을 달성한 것 같네. 수천수만의 특별구 주민들이 이 대규모 추락을 목격할 거야.
내스티 │그런데 방금 전 그 떨림은 하층부에서 온 건데. 설마, 고든이……
베일라 │우리도…… 추락하는 거야?
내스티 │아직은 잘 몰라. 내가 결합을 해제하고, '나무'의 설정을 복구해서 다시 작동 가능한 상태로 돌려놨어.
내스티 │다만 '나무' 자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베일라 │내스티, 적어도…… 너 자신은 구해야……
내스티 │3년 전, 아이파닐이 영혼들을 인도하면서 내 가설에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어. 그리고 2년 전, 한 친구가 하늘을 가르고 내게 미래로 향하는 길을 가리켜 주었어.
내스티 │하지만 그 답에 이르기까진 늘 딱 한 걸음이 모자랐어. 앞으로의 모든 건 우리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어.
베일라 │그 답…… 나에게는 보이지 않아. 설령 이미 하늘에 있다고 해도.
베일라 │모든 게 다 추락하면, 하늘은…… 텅텅 비겠지.
내스티 │……
내스티 │그러게. 하늘은 원래 텅텅 비어 있었어. 하늘을 가득 채운 건……
내스티 │……우리였으니까.
내스티 │베일라, 아무래도 하늘에는 확실히 그 답이 없는 것 같아.
내스티 │답은 당신한테 있어.

내스티 │당신을 괴롭히는 그 포효, 그 저주, 그 통곡은 나에게도 들려.
베일라 │내가 인도했거나 인도하지 못한 동포들…… 뱀파이어, 나흐체러르, 디얄…… 그리고 밴시.
내스티 │미리 '나무'에 업로드 해뒀던 모든 실험용 임시 데이터를 전부 지웠어.
내스티 │이제 당신을 괴롭히는 건 당신 자신의 미련과 분노, 그리고 슬픔이야. 마치 당신이 지난 200년 동안 보내줬던 모든 밴시들처럼, 수천수만 년 동안 영혼들에게 돌아간 모든 살카즈처럼.
내스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동족은 고통 속에서 망각 때문에 텅 비어버리게 되지, 그래서 살카즈의 영혼들은 항상 포효하고, 저주하고, 통곡하는 거야.
내스티 │하지만, 우리가 죽은 후에 반드시 정보의 잔재가 생긴다면, 그리고 살카즈의 영혼들은 그 잔재가 모여 만들어진 집합체에 불과하다면……
내스티 │마지막에 남는 게 웃음과 노랫소리여서는 안 된다고 누가 결정한 거지?
내스티 │단지 우리의 천성이 그랬다는 게 그 이유일까?
내스티 │아니.
내스티 │만약 정보의 잔재를 처리해야 한다면, 서버를 만들면 돼. 만약 지상에서의 신호로는 커버할 수 없을 정도라면, 하늘로 옮기면 그만이야.
내스티 │단순히 살아있는 자의 피난처가 되는 것만이 아니야, '나무'는 망자의 영혼이 돌아오는 곳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 이번에,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길지는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거야.

내스티 │어쩌면 '나무'에게 부족했던 건 어떠한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 하나의 결정, 하나의 진지한 소망이었을지도 몰라.
내스티 │베일라, 답을 알려줘…… 당신이 진정으로 남기고 싶은 게 도대체 뭐야?
내스티 │이 '나무'가 당신을 위해…… 내가 당신을 위해 그 기억을 보존할게.
내스티 │당신이 남기고자 하는 것들은, 절대 망각에게 빼앗기지 않아.
베일라 │……
베일라 │모르겠어.
내스티 │모르는 건가……
베일라 │처음에는 그저 모든 동포들이 덜 고통스럽고, 덜 분노하고, 덜 슬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베일라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해야 그걸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협곡도, 횃대나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뭘 남기든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내스티 │베일라……
내스티는 뭔가를 하고 싶었고,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만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이 '나무'를 더 일찍 완성했더라면, 동포들을 더 일찍 하늘의 피난처로 옮길 수 있었다면……
어머니에게도 마음 놓일 만한 추억이 생기지 않았을까?
수백 개의 부유 캡슐이 불타며 추락하고 있었다. 시커먼 유성 같기도, 묵직한 빗방울 같기도, 실 끊어진 연 같기도 했다.
모녀는 그렇게 침묵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이 순간을 영영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처럼.
내스티 │……
베일라 │아니……
베일라 │내스티…… 너는 멈출 아이가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넌 정한 길을 반드시 걸어가야 하는 아이였지.
베일라 │여기서도 멈추지 마. 네가 이룬 모든 것의 의미를 내가 빼앗지 않게 해줘. 설령 내 인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도, 너의 노력은 분명히 가치가 있을 거야……
베일라 │만약 이 '나무'가 살카즈의 영혼을 위한 새로운 안식처가 될 수 있다면, 내가 그 첫 번째 주민이 되어줄게.
베일라 │20여 년 전, 내가 너에게 집을 찾아 줬듯, 이제는 네가 날 위해 집을 찾아 줘.
내스티 │하지만, 앞으로 아이들이 '나무' 옆에 둘러앉아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때…… 들리는 건 당신의 울음소리가 아닌, 웃음소리였으면 좋겠어.
내스티 │당신을 생각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당신의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어……
베일라 │내스티, 사랑하는 우리 딸……
베일라 │내게도 있었어…… 좋은 추억,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기억이, 내게도 있었어……
베일라 │아직도 기억해, 그것은……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의 망각이 시작됐음을 알게 된 이후, 횃대나무의 오두막에서 도망쳐 내스티의 흔적을 따라 이곳저곳 전전하다 컬럼비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반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밴시에게 이건 너무나도 긴 임종 여정이었다.
비록 이 재회가 그녀의 뜻대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를 지탱하던 집념마저 사라지자, 죽음은 결국 그녀를 향해 덮쳐왔다.
베일라의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장면의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스티의 눈 앞에서는 선명해지고 있었다.
밴시는 손에 든 노를 오랫동안 젓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탄식을 들었다. 한때 함께 하나의 소망을 그렸던 전하께서,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밴시는 한참 동안 횃대나무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3달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동족이 망각 속에서 비워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밴시는 허름한 오두막 바닥에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을 도와준 한 가고일을 위해 장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눈앞에 남은 건 이미 오래전에 돌로 굳어버린 꼬리의 끝자락이었다.
밴시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끝없이 이어져, 마치 긴 눈물의 강처럼 내스티 곁을 흘러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라진 뒤 남은 것은 짧고도 가벼운 단편 한 장면뿐이었다.
밴시는 얼마 전 협곡으로 데려온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막상 입을 열면 온통 그 아이의 귀여움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밴시 또한 한때는 아이였다.
그녀는 이제 막 눈을 떴고, 대지를 향해 첫 시선을 보냈다. 그곳이 좋은지 나쁜지도 알지 못한 채.
하지만 내스티는 분명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간은 그렇게 밴시를 지나갔고, 마치 안개 호수의 수면을 스치는 바람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베일라는 그렇게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잎사귀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졌다.
내스티 │내가 당신을 받아줄게, 내가 당신을 기억할게……
내스티 │어머니.
내스티는 살포시 그 잎사귀를 받았다. 마치 예전에 어머니가 나무 아래에서 잎을 따 주던 그때처럼.
내스티 │……미소를 위한 반주라면, 굳이 골피리를 사용할 필요도 없어.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그 잎사귀를 불기 시작했다.
풀피리의 선율은 마치 비단실처럼 내스티의 일생에서 가장 부드러운 주문을 엮어냈다.
내스티 │편히 잠들기를.
ˇ
잭슨 │야라 씨, 우리 내기할까요?
잭슨 │제 비서 파바르 아시죠? 아주 진중해 보이는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가 방금 풍선을 나눠주고 나서 하늘 테마주를 얼마나 샀을 것 같습니까?
야라 │한 주도 못 샀을 겁니다. 올 때 보니, 줄이 증권 거래소 입구부터 두 블록 밖까지 늘어서 있더라고요.
잭슨 │특별구에서 이런 열기를 마지막으로 본 건, 국방부가 볼리바르에 파병을 결정한 해였죠. 그때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던 선인장 모자, 지금도 제 사무실에 있습니다.
잭슨 │모두가 그 모자를 쓰고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와, 특별구의 혈관을 초록빛으로 물들였죠.
야라 │그 모자를 쓰는 사람을 못 본 지도 한참 되었네요.
잭슨 │로버트 매케슨과 그의 '볼리바르인으로부터 볼리바르를 구한' 위업이 저녁 라디오의 웃음거리가 된 이후, 세금이 대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야라 │지금은 다들 머리에 프로펠러를 쓰고 있죠.
잭슨 │파란색, 프로펠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자. 솔직히 말하자면, 좀 시끄러워요.
잭슨 │더 고급스러운 버전도 있다더군요. 돌기 시작하면 누구나 다 아는 그 국민 록 음악이 재생된답니다.
야라 │……
잭슨 │저는 《테라가 보우하사》, 《66번 항로》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노래는 《굿나잇, 아크 1호》가 될 줄 알았는데.
잭슨 │결국, 《굿나잇, 크리스틴》이 되었더군요.
잭슨 │미래에 대한 컬럼비아인들의 열광적인 신념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그들이 따르는 대상은 어느새 바뀐 것 같습니다.
야라 │애초에, '우상'이 되는 건 크리스틴의 본의가 아니었어요.
잭슨 │저녁 라디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국방부의 본의가 아니죠.
잭슨 │술잔을 부딪치며 국방부의 실패를 축하할 때,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생각은 못했죠. 볼리바르에서 트리마운츠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잃은 게 사실은 국방부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요.
야라 │치즈 마카로니로 가득 찬 커다란 냄비를 둘러싸고 저녁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국방부, 연합 의회, 내각을 따로 구분하진 않을 테니까요.
잭슨 │……
야라 │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전설, 기적 강튼 것에 더 감화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잭슨 │하지만 때때로, 기적을 낳은 그 땅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필요도 있죠.
잭슨 │'컬럼비아' 그 자체에.

《과학기술 평론》 특파원 │드디어, 우리는 그토록 기대했던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2년 전의 그날 밤부터 오늘까지, 우리는 매일 그 모습을 상상했고……
《구원자》 특별 게스트 │조금 전의 가지런하고 일사불란한 공중회전은, 아무리 평화로운 시대라도, 아무리 부유 캡슐을 운전하더라도, 우리 에이스 파일럿들의 기량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
《진보의 목소리》 공식 채널 │지금,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는 컬럼비아가 그려온 꿈의 결정체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들을 통해, 우리에게 선보여……
《과학기술 평론》 특파원 │우리에게 증명……
《구원자》 특별 게스트 │우리에게 선고……

……

……
침묵.
모든 매체, 모든 채널에서 흘러나오던 감정 가득했던, 허스키했던, 날카로웠던, 두꺼웠던 목소리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에 빠졌다.
거리를 가득 메운 기업가, 투자자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 역시 순식간에 침묵에 빠졌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거대한 맥스 컬럼비아 특별구에는 사람들이 쓴 모자의 프로펠러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스르르, 스륵스륵, 마치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 같은 이 소리는 특별구 수백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진 성대한 추락의 유일한 반주였다.
야라 │……"기적을 낳은 그 땅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필요도 있죠."
잭슨 │'컬럼비아' 그 자체에.
《진보의 목소리》 공식 채널 │테러일까요?
《과학기술 평론》 특파원 │계획된…… 테러입니다.
《구원자》 특별 게스트 │현장 조사팀이 방금 확인한 결과, 폭발은 일반 부품으로 위장해 반입된 아츠 무기에서 일어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구원자》 특별 게스트 │그 출처는 여러 핵심권 국가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중에는……
《과학기술 평론》 특파원 │기사도 정신과는 이미 작별한 카시미어와 예로부터 아츠와 함께해온 라이타니엔이, 그들의 치욕스러운 수법을 우리에게 사용했습니다.
《진보의 목소리》 공식 채널 │오늘날의 컬럼비아에 '진보'의 목소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80여 년의 역사에서 오늘은 틀림없이 가장 어두운 날입니다……
잭슨 │컬럼비아가 제 발언을 기다리고 있군요.
잭슨 │전 이렇게 말해야겠죠. "그들이 파괴한 건 사이언스 파크 하나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컬럼비아인의 꿈과 열정을 파괴했습니다."
잭슨 │"이런 비열하고 무도한 테러 행위는 우리의 눈부신 성취를 시기하여 우릴 겁주고 위축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잭슨 │"하지만 그들은 실패할 것입니다. 컬럼비아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그 어떤 음모도 대지 서쪽의 불과 별이 영원히 빛나는 것을 막지 못할 겁니다."
야라 │그러면, 컬럼비아인들이 다시 세금을 대포로 만드는 데 동의할까요?
잭슨 │사람들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에 쏟아부은 것들…… 하늘 테마주, 프로펠러 모자…… 그 모든 것을 '방패와 검'으로 바꿀 것입니다.
잭슨 │짙은 연기가 걷히고 나면, 그 텅 비어있는 하늘은 그 어떤 광고 문구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할 겁니다.

컬럼비아 황야의 바람은 한 번도 멎은 적이 없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바람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뒤덮은 연기와 구름을 가차 없이 몰아냈다.
화려한 추락이 끝난 후, 구름 위의 하늘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러나 텅 빈 건 아니었다.

잭슨 │설마 제 눈에 뭐가 들어간 건가요?
야라 │저도 봤습니다, 부통령님.
야라 │수백만의 특별구 시민들도 보았을 겁니다.
거대한 열기구와 복잡한 프로펠러를 떠받치던 부유 플랫폼은 추락했고, 모양도 기능도 다양한 부유 캡슐도 추락했다.
부유층을 하나로 연결하던 케이블 시스템은 수백 개의 캡슐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땅과 하늘의 접시형 고탑을 연결하던 고공 엘리베이터도 붕괴했다.
그러나 단 하나뿐인 부유 시설이 두툼한 구름층을 뚫고 컬럼비아의 푸른 하늘로 떠올랐다.
야라 │……
잭슨 │……
부통령 비서 │부통령님, 메이랜더에서 온 정보입니다.
부통령 비서 │방금,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는 특별구 쪽으로의 접근을 멈추고, 남동쪽 국경 지대로 방향을 돌려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부통령 비서 │그들의 목적은 컬럼비아를 탈출하려는 것 같습니다. 메이랜더는 해당 행위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통령 비서 │지금, 국경 지대를 지키는 기동 기병부대가 '프로펠러 파라다이스'를 향해 진군 중이며, 가능한 진행 경로를 모두 차단할 계획입니다.
부통령 비서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하늘 위에 있는 정체불명의 부유 시설입니다. 특별구 항로에 배치된 수성포가 이미 조준을 마친 상태입니다.
부통령 비서 │부통령님, 연설이 곧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부통령님께서 저 시설을 뭐라고 정의하실지 듣고 싶어 합니다.
부통령 비서 │국방부는 즉각 발포를 건의했으며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메이랜더는 해당 시설의 '생존' 사실을 중심으로, 다른 형태의 선전을 펼칠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부통령 비서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수반되는 위험성도 지적했습니다. 결국 저 시설 역시 라인 랩의 작품이니까요.
잭슨 │저들이 움직이기 전에, 저 부유 시설을 먼저 자세히 보고 싶군요.

잭슨 │저건 '나무'인가?
야라 │네, '나무' 맞네요.
잭슨 │야라 씨, 라인 랩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군요. 당신은 저 나무 모양의 시설이 뭔지 알고 계십니까?
야라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부통령님. 이곳에서의 제 역할은 부통령님께서 라인 랩 때문에 크게 화를 내실 때 가벼운 농담이나 던지는 정도겠지요.
잭슨 │하하, 상관없습니다.
잭슨 │저 나무는 곧 사람들의 눈에 날지 못하는 풍선이 될 겁니다. 원래 무엇이었는지는 상관이 없겠죠.
잭슨 │국방부의 생각대로라면, 저 '나무'는 기사에게 살해당한 아기, 위치킹에게 잔혹하게 죽임당한 사절 같은 게 되겠죠. 나무의 추락으로 사람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할 겁니다.
잭슨 │메이랜더가 말한 가능성대로라면, 저 '나무'는 컬럼비아 정신을 잇는 새로운 상징이 될 것이고, 그 실루엣은 향후 10년간 생산되는 모든 모자에 찍힐 겁니다.
야라 │그런가요? 저한테는 그냥 '나무' 그 자체로만 보이는데요.
야라 │저 파울비스트들을 보셨습니까? 나무 위에서 털을 다듬고, 부리를 갈고 있더군요.
야라 │파울비스트들은 이미 나무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로요.
잭슨 │컬럼비아 전체가 상처를 입었는데, 날아다니는 나무라니요? 사람들이 저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야라 │이해할 필요 없습니다.
야라 │부통령님께서 젊었을 적 수업을 빼먹고 구경하러 갔떤 황야의 이동식 채굴 플랫폼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요.
야라 │그때는 알고 계셨나요? 거기에 타고 있던 이들이 자신감 넘치던 개척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막다른 길에 몰린 파산자들이었는지? 물건을 가득 싣고 오는 길이었는지, 아니면 목적 없이 표류하고 있었는지?
잭슨 │……하하하.
잭슨 │저는 그날 정말 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이동식 채굴 플랫폼이 마침 석양을 쫓아가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야라 │석양을 쫓아가는 채굴 플랫폼, 하늘을 나는 나무.
야라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부통령 비서 │부통령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잭슨 │야라 씨, 저는 컬럼비아의 부통령입니다. 제겐 저의 입장과 책임이 있습니다.
잭슨 │더는 예전처럼 수업을 빼먹고 석양을 쫓아가는 이동식 채굴 플랫폼을 구경하러 갈 수 없겠지요.
잭슨 │하지만……
잭슨 │그 일 덕분에 제가 처음으로 컬럼비아라는 땅에 애정을 갖게 된 건 사실입니다.
잭슨 │만약 컬럼비아의 새로운 시대를 길러 낼 토양이 저 하늘이라면……

잭슨 │나무 한 그루를 품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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